[스포주의]
1.평론
일반적인 영화의 형식에서 벗어난, 미디어 아트에 가까운 작품을 주로 만들어왔던 크리스 마커 감독이 1962년에 발표한 SF단편 영화다. 거창한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으나, 그 주제보다는 오히려 표현의 측면(영상과 서사 모두)이 더 돋보이는 작품이다.
반전을 담고 있는 영화의 스토리가 독특한데, 어릴적 공항 환송대에서의 가짜 기억을 주입 받은 남자는, 그 기억이 일종의 앵커(anchor)가 되어 시간여행을 통해 자꾸만 어떤 여자에게 자연스럽게 회귀 된다. 결국 남자는 과거의 그 공항으로 돌아 가게 되지만 어린 자신은 당연하게도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그 기억 때문에 남자는 덫에 걸려 총을 맞고 죽는다.
영화의 주제에 대해 살펴보면, 이 작품은 크게 정치적 주제와 철학적 주제를 가지고 있다. 배경에 깔려 있는 “반전 메세지”라는 정치적 주제는 알아채기 쉬운 반면에, 철학적 주제는 다소 복잡하고 까다롭다.
영화의 서사는 시간여행을 주된 골자로 하는데, 등장하는 시간 여행의 방식이 상당히 독특하다. 신체는 현재에 그대로 있고 약물주입을 통해 정신만이 다른 시간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것을 진짜 시간여행이라 말할수 있을까? 영화는 결국, 미래와 과거는 관념적으로만 존재한다는 입장이 된다. 즉, 신체는 현재의 실험실에 존재하므로 시간이 관념의 소산이라는 전제하에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 개념은 칸트의 주관적 관념으로서의 시간에 가까우며 현대 물리학에서의 물리적 시간과는 차이가 있는 셈이다.
영화속에서 남자는 과거로 돌아가 바라보는 침대, 아이들, 고양이와 같은 이미지를 실제라고 강조한다. 이는 결국 관념이 실제가 되는 것인데, 시간과 더불어 실제의 형식도 관념주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영화의 또다른 철학적 주장은 기억과 이미지에 관한 심리철학적인 것이다. 이것이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핵심 주장이라고 볼수도 있겠다. 영화는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기억”이며, 우리는 과거의 기억에 종속되어 살아갈 운명에 처해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같은 기억은 “정적 이미지”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영화라는 예술형식에서 이렇게 순전하게 아카데믹한 철학적 주제를 다루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카데믹한 철학은 논증을 기반으로 하므로 사실 영화에 적합하지 않다. 영화는 고작해야 근거가 빠진 어떤 철학적 결과만을 두루뭉술하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이 영화 환송대의 경우에도 어떤 대단한 철학적 발견을 제시하고 있지도 않고 그 주장하는 바를 글로 표현한다면 단 몇 줄로 쓸수 있는 분량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식으로 영화로 다루는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일까? 이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논문이나 책이 더 나을 것이다. 영화의 역할은 이런 것이 아니다.
결국 이 영화의 주된 가치는 그것의 영상 표현 형식에 있게 된다. 영화는 흑백의 정지 영상을 이어붙이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이 표현방식은 단순히 새롭다는 차원이 아니라 인지심리적 효과면에서 큰 시사점을 던져주는 것이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의 영상 해설에서 계속하겠다.
2.좋은 영상의 사례
남자가 사랑의 결실을 맺고 여자와 잠자리를 함께 한 장면이다. 아마도 아침에 일어난 여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듯 하다. 여자가 뭐라 말로 형언할수 없는 신비로운 아우라속에서 대단히 아름답게 표현되었는데, 일반적인 동적 영상으로는 이같은 느낌의 장면은 연출되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신비한 효과는 인간의 뇌가 가진 “상상력”에 기원한다. 정지 영상을 중간 프레임을 생략한채 이어 붙이는 방식은 자연스럽게 생략된 중간 프레임을 상상하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 영화는 인간 본연의 상상력에 기대어 영상을 현출해 내는 셈이 되며, 이같이 현출된 영상은 개개인의 상상력의 모습이 모두 다르므로 다양한 형태로 관객 개개인에게 딱 맞추어 존재하게 된다. 이와 유사한 심리적 기재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조각상이나 이목구비 일부를 생략하는 방식의 만화 캐릭터 작법(예를 들면 헬로키티 같은)에서도 발견된다.
참고로 정지 영상을 활용하는 기법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하하하>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영화 하하하 리뷰 링크 참조). <하하하>와 이 영화에서의 기법 활용의 차이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하하하>의 경우는 생략된 중간 프레임의 길이가 훨씬 길어서 장면 간에 연결되는 느낌은 덜하다. 말 그대로 정지된 그림책을 넘기는 느낌에 가깝다. 따라서 위에서 설명한 프레임간을 채우는 “상상력”을 유발하는 효과는 거의 없다. <환송대>에서는 “이미지로 구성되는 기억”이라는 주제를 암시하기 위한 목적에서도 이 기법이 사용된 것이지만, <하하하>는 특별히 기법과 영화 주제와의 연결점은 없다. <하하하>는 단순하게 <환송대>에서 사용된 기법의 형식만을 차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