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속에 액자소설식으로 나오는 희곡 바냐 아저씨를 보고, 이 작품에 대해 좀더 깊게 알고 싶어졌다. 조사를 해보니, 이 희곡을 모티브로 하는 2차 창작물들이 많다는것을 알게 되었는데 올 4월경부터 틈나는데로 원작 희곡과 관련 창작물들을 감상해보았다. 여기에 그 감상을 기록해둔다.
1.원작 희곡
먼저 원작이 되는 희곡을 읽어 보았는데, 내가 안톤 체호프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인지라 그의 전체적인 작품세계와 사고관을 이 작품 하나만을 읽고서 완전히 알기는 힘들었다. 일단은 내 주관을 중심으로 작품을 파악해 본다면,
체호프는 주로 “인간의 희생과 고통”을 묘사하고 이렇게 고통받는 이들을 연민의 시선에서 따뜻하게 위로하고자 한다. 어찌보면 그가 체념적인 운명론에 서있다고 느껴질수도 있지만, 인생의 굴레를 딱히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은 사실이기에 그의 이같은 위로는 진정성있고 의미있게 다가온다.
이 작품에서는 다양한 고통으로 왜곡된 삶을 사는 인간 군상들이 등장한다. 교수는 이 작품내에서 유일하게 희생으로 인한 고통은 없는 사람이며, 육체적인 노동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도 생로병사라는 인간 근원의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다. 엘레나는 그녀의 귀중한 젊음을 희생하고 사랑의 기회를 저버리는 어리석음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의사는 환자들을 위해 희생하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다만 그는 “자연보호”라는 공적인 일로 그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소냐는 집안일로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는 삶을 살고 있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 바냐는 희생을 추종하는 전통적인 인간상으로 교수를 미워하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엘레냐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질투심의 발로로 보인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소냐의 마지막 대사처럼 사후세계에서의 평온만을 위안으로 삼는 것뿐이다.
이 작품을 2차 창작시 표현상의 쟁점이 되는 부분과 내가 제안하는 바람직한 방향은 다음과 같다 :
1. 교수를 악한 인물로 보면 안된다. 사실 격분하여 총을 쏘는 바냐가 오히려 과한 부분이 있다.
2.모든 인물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보는 체호프의 시각이 잘 나타나야 한다.
3.의사와 엘레나의 사랑과 이 사랑을 저버리는 엘레나의 어리석음이 잘 드러나야 한다.
아래에서는 이 같은 관점에 따라 2차 창작물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2.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드라이브 마이 카 (2021)
이 영화에 대한 자세한 리뷰는 일전에 기록해두었다. < 링크 : 영화 리뷰 보기 >
바냐 아저씨에 대한 부분만 간단히 언급하자면, 희곡의 바냐가 주인공인 유스케에 해당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유스케의 처 오토가 애매한데 희곡의 교수와 대응된다고 보는 것이 좋을듯 싶다. 바냐의 희생의 대상이 교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가 바냐 아저씨를 극화한 것은 전혀 아니다. 영화속에서 희곡의 부분을 모티브로만 사용할뿐이다. 따라서 희곡의 내용이나 등장인물이 영화속의 그것과 정확히 1:1로 대응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쨋든 영화는 외도를 저지른 부인을 부정적으로 그리지 않고 있고(따라서 교수를 악하게 그리지 않는 셈이 된다) 특히 마지막 소냐와 바냐의 연극 장면에서 그 어떤 2차 창작물 보다도 연민의 시선을 강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희곡 바냐 아저씨를 잘 해석해 냈다고 평가할수 있다.
3.안똔체홉연구회 연극 (2022. 4)
올 4월경에 “안똔체홉연구회”가 대학로에서 공연한 연극이다. 공연장에는 나처럼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온 관객들이 꽤 있었다.
바냐를 코믹하게 재해석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연민의 시각이 흐려질수 있다는 단점이 있으나, 극의 마지막 소냐와의 씬을 잘 처리하여 결과적으로 썩 나쁘지는 않게 되었다.
교수를 히스테리컬하고 위선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극중 주변인 정도로 격하시켰다. 이는 극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부분이다. 의사와의 사랑을 저버린 엘레나의 어리석음이 잘 부각되지 않았고 오히려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을 한 것처럼 표현하였다. 이는 극을 전통적인 도덕관에 따라 태만하게 이해한 결과이다.
의사 역할을 한 배우가 이후에 소개할 영화 <42번가의 바냐>의 배우와 매우 흡사한 외모와 목소리를 가졌다. 아마 해당 영화를 벤치마킹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4.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감독, 바냐 아저씨 (1970)
소련 시절에 제작된 영화로, 러시아 본토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모든 연기자들의 연기가 대체로 뛰어나며 막간을 조명의 조절을 통해 표현하는 등 연극적 연출을 살리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색다른 감성을 준다. 당대 러시아의 분위기를 잘 살린 미장센도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절제되고 진중한 분위기에서 극이 진행되나 소냐와 바냐의 마지막 씬은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식이라서 조금 아쉽다.
이 작품에서 교수는 바냐의 총에도 끄덕 안하는 굳건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교수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원작에 대한 이해가 높다고 볼 수 있다.
등장인물을 향한 연민의 시선이 많이 약한 것과, 의사와의 사랑을 버리는 엘레나의 어리석음이 부각되지 않는 것은 아쉬운 지점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좋은 영상 두가지를 소개한다. 첫번째 장면은 엘레나와의 사랑이 뜻대로 되지 않은 바냐의 우울함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거울을 사용하여 간접적으로 바냐의 모습을 비추는데, 첫번째 거울은 볼록거울로 상이 심하게 찌그러져 왜곡된 모습으로 비춰진다. 이를 바냐의 어그러진 마음을 뜻하는 메타포라 이해할수도 있을 것이다. 두번째의 거울은 일반적인 평면거울인데 특별히 영화의 내용과 연관을 가지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첫번째 거울이 어느정도 바냐의 마음을 표현하는 소재라 볼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 영화에서의 거울상은 미적 목적이 크다. 즉, 아름답고 독특한 미장센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에서 거울이 사용된 것이다.
두번째 장면은 바냐 일행이 간밤에 술을 먹은 후 다음날 소냐가 그 흔적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밤새 시간의 경과를 천장에서 물컵으로 떨어진 물의 양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원래의 희곡에는 없는 장면으로 아주 재치있고 유머러스하면서도 효과적인 표현이다.
5.루이 말 감독, 42번가의 바냐 (1994)
누벨바그의 거장 루이 말 감독의 작품이다. 제목의 42번가는 브로드웨이를 뜻하는데, 영화 속에 또 다른 연극이 삽입되는 액자식 구성으로 연출되었다. 이 같은 기법이 독특하게 보이긴 하지만 연극을 카메라로 그대로 찍어 옮겨놓는 수준에 그쳐 연극의 현장성을 전혀 살리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불필요한 연출 방식으로 느껴진다. 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평범한 연출을 했더라면 어땟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내용적인 면을 살펴보면, 먼저 교수를 악하게 그리지 않으며, 약한 존재로 묘사한다. 삶에 있어서 그의 고민도 잘 드러나 있으며, 교수와 엘레나의 로맨스에 관련된 묘사도 좋다. 바냐는 코믹하게 그렸는데, 해당 역을 연기한 월리스 숀의 이미지가 캐릭터를 지나치게 가볍게 보이게 만든다. 나머지 소냐와 엘레나의 묘사는 무난한 편이다. 부분적으로 연기와 연출이 어색한 부분도 있는데, 특히 교수가 집을 팔자고 가족들에게 제안하는 씬에서 그러하다. 총평하자면, 루이 말이라는 감독의 무게가 갖는 기대에는 많이 못미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