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1.평론
많은 욕망을 가진 주인공이 곤경에 빠지고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비극만을 쓰는 일본인 소설가가 있다. 소설가는 이 욕망들이 사실은 자신의 것이고 소설은 그저 이같은 욕망을 부정했던 도피처였을 뿐임을 깨달는다. 이번엔 그는 조금 다른 소설을 쓴다. 자기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한 소설을 쓰는 것이다. 바로 욕망의 주인공이 해피엔딩을 맞이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김종관 감독 본인 – 영화속 소설가 – 그 소설가가 쓴 소설” 이라는 2단의 액자 소설식의 독특한 구조를 갖는다. 즉, 감독 본인의 예술관을 영화속 소설가를 통해 구상된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전달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예술에 있어서의 진실함”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만 이를 확대하여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거짓말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이 작품을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물 정도로 보겠지만 사실은 감독 나름의 진중한 고민이 숨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젠체하지 않고 가볍게, 그리고 부담없이 풀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한 작품이다.
거짓말에는 두 종류가 있다. 바로 “남에게 하는 거짓말”과 “자기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이 그것이다. 원칙적으로야 둘다 해로운 것이겠지만 그 우열을 가려본다면 자기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이 압도적으로 해롭다. 자기기만은 종국적으로 마음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의 갈등을 빚어내기 마련이고 이러한 갈등은 자아를 근본에서부터 흔들어 대기 때문이다.
영화속의 남녀는 모두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남자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거짓되고 여자는 남에게는 거짓되나 본인 스스로에게는 진실하다는 차이가 있다. 여자는 최악의 하루가 끝나고 텅빈 벤치에 앉아 “사실은 솔직했다”는 연극 대사를 읊조리는데, 이것은 자기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는 말이다. 그녀는 세 명의 남자를 만났던 당시에는 모두에게 마음이 있었고 이 감정에 솔직하게 행동했을 뿐이다.
아울러 여자는 소설가에게 “연극이란 것이 할때는 진짜다. 비록 끝나고 나면 가짜지만”이라는 재미난 말을 한다. 거짓의 또다른 진실을 숨겨놓은 듯한 이 말은, 언뜻 심오하고 신비로운 말 처럼 들리고 아마 감독도 그렇게 느낀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신비로운 것들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이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다를 뿐이다. 즉, 앞 문장은 연극을 할 당시에 느끼는 감정을 지시하는 것이고 뒷문장은 연극의 세계와 실제세계를 비교한 진리값을 가르키는 것 뿐이다.
영화가 형식적으로 감각적인 영상과 적극적인 음악의 사용등으로 마치 뮤직비디오나 트렌디 드라마와 같은 연출을 지향한 덕분에 가리워질수도 있으나 김종관 감독은 이 영화에서 미시적으로도 정밀한 표현의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생각지 못한 방법을 은밀하게 쓴다는 점에서 매우 섬세하고 사려깊음이 느껴진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일본인 소설가와 여자의 대화에서 소설가는 여자가 말을 못알아듣자 영어 문장을 다르게 바꿔가며 패러프레이징하고 여자는 그제야 말을 알아듣는다. 이러한 행동이 여러 차례 계속 반복되는데 이같은 장면은 은연중에 두 사람이 어느정도 의사소통이 되긴 되지만 그래도 언어의 장벽이 분명히 실재한다는 정보를 관객에게 아주 정밀한 수준에서 전달해준다. 대게 다른 영화에서는 이런 경우 그냥 외국어로 손짓 발짓 힘겹게 대화하는 두루뭉술한 선에서 표현을 끝냈겠지만 이 영화는 이같은 섬세한 상황적 장치를 함으로서 표현의 해상도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또다른 성취는 캐스팅에 있다. 여자역의 배우 한예리는 적절한 캐스팅의 좋은 사례다. 인상 쓰는 모습이 이렇게 귀여운 여자가 또 있을까? 사실 그녀는 전형적인 미인상은 아니다. 하지만 흔히 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진 얼굴이다. 그녀의 모습은 인공적이지 않고 아마추어적인 느낌을 영화에 더해주어 이 영화가 가진 영상 형식적 화려함의 부담스러움을 중화시켜 준다.
PS1. 여담으로 소설가 역을 맡은 이와세 료의 일본어 나레이션이 아주 아름답다. “일본어도 이렇게 아름답게 들릴수 있구나” 하는 일본어의 재발견(?)이라는 색다른 경험을 준다.
PS2. 이 영화는 제목을 “최악의 여자”에서 “최악의 하루”로 바꾼것인데, 이는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좀더 관객 친화적으로 제목을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최악의 하루”는 여자의 입장에서, “최악의 여자”는 남자의 입장에서의 제목인데, 제목을 최악의 여자로 한다면 사실 그녀는 최악이 아니기때문에 반어법적인 제목이 된다. 관객의 오해를 덜기 위해 좀더 쉬운 제목을 택한듯 하다.
PS3. 사실 내가 이 영화를 본 것은 영화 포스터 때문인데, 영화속의 상황과 여배우의 매력이 아주 잘 드러나는 재미난 포스터인것 같다. 빵터진다는 문구와 풍선껌을 불고 있는 모습이 재치있다.
2.좋은 영상의 사례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로 일상생활에서 문자, 이메일, 소셜미디어등의 활용이 늘어가고 있다. 영화속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전자기기를 통한 의사소통을 영상에서 어떻게 구현하느냐가 문제될수 있다. 대체로 세가지 방식이 널리 사용되는데, 1)CG를 이용해 오버레이하는 방법, 2)실물의 핸드폰을 직접 보여주는 방법, 3)나레이션으로 통신내용을 불러주는 방법이 그것이다.
여기에서는 첫번째 CG를 이용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문자 메세지 전송 장면과 트위터 게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이렇게 CG를 이용하는 경우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할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필연적으로 강하게 인공적인 위화감이 든다는 단점도 있다. 이 영화에서는 단점을 최소화하여 연출하는데 어느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면, 먼저 사용된 폰트와 그래픽의 구간이 전반적으로 상당히 작고 아기자기한 편이고 파스텔톤의 색상을 사용하여 점잖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문자앱과 트위터앱 고유의 사운드와 애니메이션을 넣어 사실감을 높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실사 촬영 당시 부터 미리 CG의 삽입을 염두에 두어 영상 구도와 미장센을 세밀하게 디자인하였다. CG가 들어갈 자리의 여백을 충분히 남겨두고 아름다운 배경으로 화면을 디자인함으로써 자연스럽게 CG와 실사가 함께 어우러지는듯한 느낌을 주는것이다. 이같은 일련의 조치로 CG가 유발할수 있는 유치함과 위화감이 어느 정도 희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