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1. 평론
왕가위 감독을 대범한 영상 스타일리스트에서 주제와 서사 측면에서의 거장으로 도약하게 만들어준 작품이다.
왕가위 감독의 작품답게 감각적인 미장센을 자랑하는데, 영화는 주로 홍콩 특유의 좁은 박스식 건물 구조를 통해 만들어진 내부의 프레임을 통해 장면을 보여준다. 무언가 위축되고 억압적인 답답한 상황을 단지 영상의 배경만으로 구현하고 있다. 이는 객관적인 환경이 주관적인 심리 묘사로 전이되었다는 점에서 표현 영역의 한계를 뛰어 넘고 있는 탁월한 지점이다. 이러한 내부 프레임 구조는 야스지로 감독의 동경 이야기와 표면적으로는 유사하나 동경 이야기는 단순히 일반적인 분위기 전달에 그쳤다는 점에서 화양연화는 이점에 있어서 한층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주로 주인공인 양조위와 장만옥 두 사람의 모습만을 보여 주고 각자의 배우자의 얼굴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두 주인공에게만 주위를 집중하는 것인데, 적확한 캐스팅의 두 배우는 영화의 또다른 탁월한 지점이다. 특히 갸날프면서도 강한 양조위의 얼굴은 그 얼굴만으로 연기의 반을 해내고 있다.
주제적으로는 불륜을 다루고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처음에는 각자의 배우자에 대한 대역적인 복수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의 사랑은 깊어진다. 하지만 도덕률이란 제한 때문에 흔히 그렇듯이 이들의 금기된 사랑은 아쉽게도 미완의 사랑으로 남는다.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영화의 주제의식은 기존의 도덕질서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다고 볼 여지도 있으나 한발짝 물러서서 보면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이들의 관계 자체를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무엇이 남녀간의 사랑을 아름답게 만들까? 감정 그 자체의 순도와 강도가 아닐까? 이점에서 감독이 가진 시각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두 사람의 사랑은 전통적 도덕률이라는 굴레의 방해를 받고 있고, 이것은 그들의 사랑이 가진 아름다움을 보다 깊고 순수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는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또 다른 물리적 한계로 나아간다.
시간은 왕가위 감독의 주요한 영화적 탐구 주제중 하나로서, 아비정전, 중경삼림과 같이 본 작품에서도 역시 시간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지고 있다. 즉, 이 영화는 시간에 대한 영화라 말할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는 소품으로서의 시계를 자주 클로즈업하고, 시대적 사건을 묘사하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여주기도 하며, 스텝 프린팅 기법으로 영화적 시간을 효과적으로 콘트롤하기도 한다. 인생의 가장 찬란했던 시간, 영화 자체가 바로 그 찬란한 시간의 봉인이다. 이 봉인은 사실상 기억이자 레코드가 된다.
생생했던 사랑이란 감정은 이제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사랑의 감정 그 자체는 세월이 흘러 소멸되었으나 사랑은 이제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든다.
2. 좋은 영상의 사례
첫번째 씬은 양조위의 넥타이를 근거로 각자의 배우자가 내연관계에 있음이 밝혀지는 장면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대화 부분을 독특하게 패닝샷으로 연출하고 있다. 속도감있는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긴장감을 높이려는 의도이다. 반면 이 부분의 선후로는 일반적인 분리병치의 컷으로 연출하고 있으며 패닝샷을 단 두번만 사용함으로써 과한 연출을 자제하고 있다.
두번째 씬은 왕가위가 즐겨 사용하는 스텝 프린팅 기법을 이용한 슬로우 모션으로 연출되었다. 느린 화면 구성으로 “시간의 경과”를 스타일리시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두 사람의 고독감과 갈등이 적절하게 묻어 나오는 장면이다. 사실 이런 느린 화면 연출은 자칫 잘못하면 유치하게 보일 위험이 크다. 실제로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에서의 동종의 연출은 지금 시점에서 보면 다소 식상해 보이기도 하다. 그와 달리 이 영화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고 알맞은 느낌을 주는데 , 그 이유는 영상이 서사와 긴밀하게 견련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슬로우 모션이 쓸데없이 사용되어 영상의 화려함만을 추종한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사용의 목적이 뚜렷하기 때문에 이처럼 자연스러운 영상이 연출된 것이다. 아울러, 본 씬에서는 이 영화의 주요 테마인 “시간”을 상징하는 시계라는 소품이 미장센의 구성부분으로서 활용되었으며, 영상의 주제를 탄탄하게 뒷받침하는 적절한 음악도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