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영화는 실로 많은 것들을 풀어 놓는다. 사랑의 의미, 고난을 마주하는 방법, 화합과 평화의 메세지등. 하지만 이들은 모두 긴밀하게 얽힌 실처럼 사족없이 서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주인공 유스케의 처 오토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연극 극본 창작이라는 예술로 이겨나가고 있는 여인이다. 그녀는 함께 작업하는 젊은 배우들과 외도를 벌이고 있다. 그녀의 성욕은 예술적 창조를 위한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그녀가 말한 칠성장어 소녀 이야기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은유임과 동시에 내연남인 배우 고지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그녀는 소녀가 짝사랑의 방에 열심히 자신의 흔적을 남긴 것 처럼 남편에게 발견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유스케의 도피는 계속된다. 내연남 고지 역시 발견되고 싶어 한다. 오토와의 관계를 공식화하고 그녀를 온전하게 갖고 싶기 때문이다. 결국 고지는 이야기 속의 침입자로 은유된 사진 찍은 시민을 죽이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 운전사 미사키의 말처럼 오토가 유스케를 사랑하는 것과 다른 남자를 갈망하는 것 사이에는 모순은 없다. 사랑은 성욕과 성욕이외의 것들로 구성된 다차원적인 것이고, 사랑 그 자체에는 배타성이 없기 때문이다.
자식과 아내를 잃은 유스케의 고난과 더불어 영화는 또다른 인생의 고통을 보여준다. 바로 미사키의 어린시절 엄마와의 관계가 그것이다. 미사키의 고통 역시 유스케와 같은 “상실의 고통”이다. 학대하는 엄마의 죽음을 외면한 미사키는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애증병존의 복잡한 아픔을 가진 여자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고통에 직면할 것을 요청한다. 이는 단순한 순응이라기 보다는 운명을 받아 들이는 적극적인 자세에 가깝다. 유스케는 그동안 피해왔던 연극 배우 역할을 다시금 맡게 되고, 미사키는 엄마가 죽었던 과거 고통의 공간에 직면한다.
영화는 예술이 가진 치유의 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극중 액자 소설식으로 등장하는 안톤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의 내용은 영화속 유스케의 상황과 많이 닮아 있다. 영화속 또 다른 예술의 힘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의 원리에 따라 유스케의 영혼을 정화하고 그의 치유를 돕는다. 미사키 역시 그의 연극을 보며 과거의 슬픔으로 부터 점차 해방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일종의 열린 결말인데, 보는이에 따라 사족이 아닐까 의문이 들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사키가 치유된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는 점에서 감독으로서는 식상하지 않은 결론을 낸 것이다. 죄책감의 상징이었던 그녀의 얼굴 흉터는 성형 수술로 사라졌고 그녀는 이제 유스케의 빨간색 차를 몰고 자신이 좋아하는 개를 키우며 한국에서 진정한 본인의 인생을 산다.
그런데 여기서 유스케와 미사키의 관계에 의문이 든다. 바로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추측도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에 특별히 모순되는 점은 없다. 말 그대로 이 것은 “열린 결말”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것이 더 좋은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행복이 그들에게 더해지는 것이 더 아름답지 않은가?
드라이브 마이 카! 익숙하고 정체된 과거를 상징했던 유스케의 빨간색 차는 이제 새로운 희망의 공간으로 탈바꿈 한다.
많은 서사적 요소들속에서 해매이지 않고 간명하게 엮는 감독의 솜씨가 돋보이며, 깊이 있고 사실주의적인 대사, 자칫 형식적일수도 있는 상징주의적 기법들이 무난하게 사용된 담백한 수작이다.
영화속 <희곡 - 바냐 아저씨> 에 대하여 좀더 깊게 알아 보았다.
관련 내용은 아래 글을 참조 :
https://aexresearch.com/%ec%95%88%ed%86%a4-%ec%b2%b4%ed%98%b8%ed%94%84-%eb%b0%94%eb%83%90-%ec%95%84%ec%a0%80%ec%94%a8-%ea%b9%8a%ea%b2%8c-%eb%b3%b4%ea%b8%b0-%ed%94%84%eb%a1%9c%ec%a0%9d%ed%8a%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