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몇가지를 각색하여 엮은 작품으로, 소설가 지망생 종수(유아인 분)가 주인공이라는 점, 종수가 쓰는 소설이 영화속 주요 소재가 된다는 점, 문학작품과 같은 미려한 대사로 극이 구성되어 있다는 점등, 문학과의 연결고리가 여러 면에서 큰 영화다.
종수는 가난한 청년으로 자아에 갇힌 폐쇄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해미(전종서 분)의 방에서 하는 자위는 사회적 연결고리 없이 자기 자신과의 교섭으로 욕망을 푸는 고립된 현실을 잘 표현해주는 장치다.
반면 벤(스티븐 연 분)은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자신감과 여유가 넘치는 인물이다. 자신이 창조한 재물을 다시 파괴한다는 그의 말처럼 파괴적 욕망을 베이스로 삼아 쾌락에 봉사하는 삶을 살아간다. 다만 여느 영화들과는 달리 이 영화에서의 벤은 부유층이 가지는 통속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있다. 즉, “명확한 악”으로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그는 가난한 종수에게도 충분히 예의바르며 포크너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종수의 말을 듣고 직접 그 책을 사다 볼 정도로 성의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교외의 외딴 저수지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서는 어딘가 모를 외로움도 느껴진다. 영화는 벤을 선과 악의 정확한 중간 지점에 위치해 놓으며 관객이 그의 도덕성을 성급히 결론 짓지 못하도록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매력으로 그를 휘감아 놓는다.
해미(전종서 분)는 일체의 편견없는 눈을 가진 신비로운 여자로 그려진다. 그녀는 부유층 자제들과도 어려움 없이 어울리며, 자신의 열악한 사정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꿈을 위해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스토리상의 주요 논점은 두가지 인데, “벤은 해미를 죽인 범인인가?” 와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소설을 작성하기 시작한 후반부가 소설인지?” 가 그것이다. 일단 감독은 의도적으로 이 영화를 이른바 “열린 결말”로 연출했다. 따라서 각각의 질문에 어떤 답을 하여도 크게 모순되는 점은 없다. 하지만 결론에 따라 정해지는 영화의 의미와 자연스러움을 고려할때 나는 다음과 같은 답을 제안한다. “벤은 해미를 죽인 범인이며, 영화의 후반부는 소설이 아닌 실제 현실이다.”.
우리는 영화가 비록 환상적이라 해서 현실 세계의 합리성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즉, 현실의 합리주의적 태도로 볼때, 벤을 범인으로 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현실의 경찰은 영화와 같은 실종사건에 있어서 마지막 접촉이 있었던 자를 주요 용의자로 보기 마련이다. 해미의 시계와 같은 모델을 해미의 동료도 차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지만, 이런 저가의 제품을 그것도 여자시계를 부유한 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영화는 비록 벤이 범인일 단서와 그렇지 않을 단서를 교차하여 제시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볼때 양자 사이에 균형은 깨져 있다. 즉, “벤이 범인이 아닐꺼란 상태”에서 범인이라는 반대 증거가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벤이 범인일 것이라는 상태”에서 반대 증거가 제시되는 상황이며, 그 반대 증거들은 벤을 무죄로 생각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고 오히려 빈약한 것들이다.
결국 벤이 정기적으로 태운다는 비닐하우스는 그동안 그가 죽인 여자들을 은유하는 메타포였으며, 그는 살인 충동의 만족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연쇄 살인자였던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해미의 시계를 비롯한 악세사리들은 모두 희생자로부터 취득한 물건들이며 벤의 집안에 있던 고양이는 해미의 고양이다.
종수는 해미가 말했던 우물의 존재에 집착한다. 이 우물이 존재해야 해미에 대한 종수의 신뢰가 확보된다. 이처럼 해미에 대한 종수의 마음은 사실 증거에 의존할 정도로 빈약한 것이다. 아마도 종수의 엄마의 기억대로 우물은 존재했을 것이다. 해미의 가족들 조차 카드빚에 쫒기는 해미의 말을 믿지 않고 해미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우물 이야기를 거짓말로 치부한다. 단지 돈 때문에 말이다.
상당수 관객들은 종수가 벤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고, 이 때문에 해미를 죽였다는 종수의 확신은 확증편향적인 망상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만들어진 종수에 대한 관객의 편견이 된다. 종수의 확신은 지극히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이처럼 영화는 자본주의가 인간에 대한 인식에 끼치는 영향을 영화의 밖에서 실감케 해준다.
종수는 결국 자기에게 주어진 미스테리한 상황을 해결했다는 확신을 갖고 해미의 방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이 시점부터의 이야기를 종수의 소설속 상상으로 볼 여지도 있는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무언가 촌스럽고 작위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종수가 소설을 쓰는 장면은 종수가 비로소 자신이 사는 세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자각의 상징이자 선언으로 보는 것이 옳다.
사실 종수의 해미에 대한 사랑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그녀에 대해 완전히 신뢰하지도 않으며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을 이해하지 못한채 창녀라는 모욕을 주기도 한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종수에게 있어 해미는 단한번 섹스를 한 사이, 자위를 위한 상상속의 매개물일 뿐이다. 따라서 벤을 죽인 종수의 행동은 해미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그것은 불합리한 자본주의 체계의 전복이자 종수에게 잠재된 파괴욕의 실현이다. 꿈속에서 종수는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며 묘한 웃음을 짓는다. 이 무의식적 파괴의 욕망이 이제 벤을 죽임으로서 현실화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