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이 영화의 주제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즉, 사랑에 대한 탐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랑과 아울러 “고독에 대한 탐구”도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에서의 여성은 야생성을 간직한 원숙한 여자이다. 그녀는 순수한 사랑은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남자는 청교도적인 윤리관에 따르는 순진한 19세 청년인데, 그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순결하고 성스러운 사랑을 상징한다.
데이트를 마치고 그녀의 집에서 여성의 유혹이란 시험에 든 남자는 그만 사정을 하게 되고, 죄악을 저지른 셈이 되는 남자는 죄책감을 못이겨 손목을 긋는다. 비로소 여성은 남자가 옳았다는 선언을 하는데, 이는 순수한 사랑의 인정을 뜻한다. 남자의 상태를 걱정하던 그녀는 반전된 상황에서 남자가 자신에게 그랬던것 처럼 거꾸로 남자를 관음한다. 남자로부터 위로받는 망원경속의 환상을 보며 감동하는 여자를 보여주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영화의 서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두가지 방법이 가능한데, 각각을 “전통적 해석”과 “역설적 해석”이라 이름 붙여볼까 한다. 먼저 전통적 해석은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아마도 염두해두었을 방식으로서, 영화를 등장인물들이 취하고 있는 표면적인 태도대로 보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이 영화는 남자의 순수한 사랑을 깨달은 여자의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관음에서 시작된 사랑이라니, 무언가 이상하다. 이같은 음침한 상황에서 사랑을 느끼는 여자의 행동이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순전히 남자의 순수함이 모든 악조건을 뚫고 여자에게 닿았다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다소 황당한 설명만 가능할 뿐이다.
이를 영화가 표면적으로 제시하는 등장인물의 태도를 넘어, 역설적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이 의문은 자연스럽게 풀린다. 먼저 남자와 여자는 둘다 고독의 고통을 받고 있을 뿐이다. 남자는 사실 관음이나 하며 마음을 달래는 겁쟁이에 불과하다. 여자의 섹스 장면에서 망원경을 내리고 차마 보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질투심과 소유욕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차라리 보는 것이 그나마 자연스럽고 건강한 정신이 될 것이다. 물론 진정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관음 따위는 필요가 없을테지만 말이다.
상징주의적으로 시계의 키(key)는 남성의 성기를, 여자가 마시는 우유는 정액을 상징한다. 남자가 이들을 여자에게 준다는 것은 남자가 가지고 있는 성욕을 의미한다. 그는 내면의 성욕과 종교적인 도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의 자살 기도는 표면적으로는 청교도적 속죄 의식이지만 사실은 성적으로 미숙하다는 자존심의 손상에 따른 도피행위일 뿐이다. 이처럼 남자의 나약함은 영화 전반에 걸쳐 계속되고 있다.
여자가 우유를 흘린다는 것은 그녀가 갈망하고 있는 섹스로 인한 완전한 합일의 실패를 의미한다. 이처럼 그녀는 본디 건강하고 풍부한 야생성을 가진 여자이다. 이같은 상반된 상황속에서 어떻게 이처럼 나약한 남자가 여자를 순결하고 진정성있는 마음으로 보호해준다는 망상을 여자는 품고 있는 것인가? 이는 단지 여자의 커다란 고독이 그녀의 건강한 야생성을 잠식한 것에 불과하다.
결국 남자와 여자는 모두 자신들의 실존적 고독을 못이겨 “숭고한 사랑”이란 허울된 망상으로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여자는 그녀가 가진 고유의 건강한 야생성까지 버려가면서 말이다. 여자는 말한다. 자신이 나쁜 여자라고. 하지만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우리는 선과 악을 가리지 말고 사랑할지어다!
감독의 손을 떠난 영화는 해석에 있어서 감독의 정신에서 벗어나게 된다. 따라서 비록 감독이 먼저의 진부한 해석을 의도한 것이 맞다고 해도 그것이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세계를 감독이 창조한 것이고, 이는 사실적이고 정교한 묘사와 더불어, 흐리게 여백을 남긴 연출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