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홍상수 감독의 “진리의 형식”에 대한 탐구는 이 영화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이는 진리라는 것이 언어적 형식을 갖는지 아니면 비언어적 형식을 갖는 지에 대한 문제이다. 영화 <극장전>에서 김상경의 “생각을 하고 살자”는 독백은 언어적인 진리를 암시하고, <그 후>에서의 김민희와 권해효의 토론 장면에서도 이 주제는 치열하게 논해진다.
이혜영의 “얼굴 앞에 진리가 있다”는 취지의 말은 언뜻 인간의 표피 밖에 진리가 있다는 말인 것 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것은 표피 안쪽에 진리가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녀의 말은 내재된 진리가 마치 아우라가 지듯 얼굴 바로 앞에 아른거림을 포착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진리는 그녀가 말했듯 직관적으로만 인식 가능한 신비주의적인 형태의 비언어적 진리이다.
서사적으로는 권해효와 이혜영의 관계가 영화의 큰축을 이룬다. 이 것의 해석에는 두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는데, 이를 권해효의 위선으로 보는 해석은 너무 지루하고 태만한 해석일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바라보는 것이 보다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혜영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권해효는 울음을 터뜨리는데 그는 정말로 투명하고 진실된 슬픔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화가 진행되면서 그녀와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다. 다음날 다시 그는 전날의 만나자는 약속을 취소함으로서 도덕으로 도피한다. 권해효의 행동은 사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원래 이런 법이다.
그의 행동을 두고 허탈감을 인위적 웃음으로 해소하려는 이혜영. 어제의 대화와는 다르게 그녀는 아직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다. 어쩌면 역으로 그녀의 행동을 위선적이라 볼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인간의 자연스러움일 뿐이다. 자신이 해탈 했다는 착각과 기대의 좌절에서 오는 허탈감과 공격성.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들인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는 홍상수 감독의 기존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밖의 몇가지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먼저 하나의 도시 보다 훨씬 좁은 영역인 건물이라는 장소에 대한 탐구를 시도하고 있다. 즉 협소한 장소를 매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영화 초반부의 녹색의 밝은 톤은 한동안 일관성을 가지고 푸르른 봄날의 수풀, 칠성사이다병, 다리의 초록 구조물등에서 계속 이어진다. 이에 대비하여 이혜영의 시한부 삶이 밝혀지는 이후의 비가 내리는 어두운 톤은 “반전”이란 서사적 장치를 영상 미학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