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신화는 칼 융이 말한 상징의 원형이 잘 보존된 대상이다. 원시적 삶속의 신화와 풍습에는 이성의 방해를 받지 않은 인간 본연의 심리가 온존히 남아 있으리라 추측해볼수 있다. 이 영화는 폐쇄된 부족사회의 신화와 풍습을 통하여 상징적 표현을 이루어 낸 “정신분석학적 영화”다.
비참한 사건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여자의 트라우마는 남자친구를 재물로 바쳐 살해함으로서 치유된다. 죽음을 통한 생이라는 이 역설적인 모습은 “타나토스의 미학”이라 불리울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의 삶은 이처럼 서로 모순되는 역설적인 면들의 조화와 균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이 악이 말 그대로 필요악으로서 존재하며, 그 존재를 우리 스스로 부정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영화 전체적으로 이러한 “역설적”인 요소들이 의도적으로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끔찍하게도 어두운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시간은 밝은 백야이고, 살인을 저지르는 마을 주민들은 너무나도 밝고 친절하다. 총천연색의 밝고 명랑한 원색의 꽃장식들을 배경으로 처참하게 도륙된 시체들이 놓여져 있다. 이러한 역설적 미장센들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더욱 부각시켜 준다.
마을 주민들은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에 모두가 일치되어 반응한다. 마치 사건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감정표현을 하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 즉 감정의 정화를 상징한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각각 한편의 연극이라 볼 수도 있다. 마을주민들은 이 연극을 관람하는 일종의 관객들로 설정되어 연극에 참여함으로서 자신들의 감정을 배출하는 것이다. 이로서, 그들은 소위 말하는 치유적 효과로서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이다.
국내 개봉 당시 수입사는 장난스럽게 이 영화를 “힐링 영화”로 홍보하였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정신분석학적 치유의 영화라는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맞는 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