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의 서양 철학사를 읽다가 이 책에서 논리학에 대한 부분만을 모으고 다른 도서들을 참고하여 보완하면 “논리학사”에 대한 간략한 책을 만들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본인의 역량이 부족한 부분도 있고 시간이 많이 걸리겠다 싶어 당초의 계획대신 그동안 정리해둔 원고 초안을 그냥 여기에 기록해두는 정도로 만족하려 한다.
참고 판본은 “러셀의 서양 철학사(최민홍 역) 상, 하권” 이며, 책을 처음 부터 쭉 읽어가며 논리학과 관련된 부분이 나오면 나름대로 이해를 하고 메모를 하는 식으로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일단 대강의 초안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므로 꼼꼼하게 내용의 정확성을 확인하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1.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가 논리학에 기여한 가장 큰 업적은 대전제->소전제->결론으로 이어지는 삼단논법이다.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 삼단논법을 궁극의 완전한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이 같은 생각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르다.
(1)먼저, 아리스토텔레스는 a.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와 b.모든 그리스인은 인간이다. , 두 명제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자는 다른 것이다. 소크라테스 한명이 인간인지 아는 것과 모든 그리스인이 인간인지 아는것은 난이도 면에서 완전히 다르다. 명제 b는 사실상 형식적인 언어상의 명제에 불과하며 실제로 세계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단지 그런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가 만을 말할뿐이다.
삼단논법은 단지 연역적인 하나의 논의일뿐이며, 수학은 모두가 연역적인데도 불구하고 삼단논법의 형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2)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을 가정해보자.
모든사람은 죽는다.
스미스씨는 사람이다.
스미스씨는 죽는다.
여기서 대전제는 사실 정말로 모든 사람이 아니라, 제한적인 –이를테면 100년전이라던지 150년전이라던지– 사람들을 가르킨다. 즉, 대전제는 귀납적인 것이다.
귀납법은 새로운 지식을 주지만, 연역은 그렇지 못하다. 논리학과 순수수학 이외의 중요한 추리는 모두 귀납적이다.
실체(본질도 역시 그러하고 )란 개념은 단지 언어상의 편의에 지나지 않는것을 형이상학적으로 변화시킨것이다. 편의상 일련의 사건들을 특정인 — 이를테면 소크라테스, 스미스 — 에게 배분하여 기술한다. 이렇게 해서 소크라테스나 스미스를 오랜 시간에 걸쳐 존속해온 “사물”로 보며, 그들에게 일어난 사건보다 이같은 사물을 더욱 견고하고 실재성 있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사실이 아니며, 실체란 사건을 한 묶음으로 모아 들이는 언어적인 편리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프랑스란 말은 한낱 언어상의 편의를 위해서 사용한 것이며 프랑스란 사물은 없고 단지 그 여러 부분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프랑스란 단어는 일련의 사건들에 관한 집합 명사에 불과하며 우리가 그것을 그 이상의 어떤 것으로 보려고 할 경우에 그것은 전혀 알수 없는 신비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무언가가 되어 버린다.
결론적으로, 삼단논법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의 큰 중요성을 가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늘날에 논리학을 배우려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나 그의 제자들의 저서를 읽는 것은 시간낭비라 할만하다.
2.스토아학파의 논리학
인식론에서 플라톤과는 달리 “감각”을 용인한다. 즉, 감각의 허위성을 일종의 그릇된 판단으로 보아 우리가 조금만 조심하면 이를 피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삼단논법을 구성하는 첫번째 전제의 증명이 문제되는데,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증명을 위한 누구나 인정가능한, 다시 말해 “자명한” 원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원리중 대표적인 것이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과 같은 것들이다. 스토아 학파의 이같은 주장은 최소한 데카르트의 시대까지 오랜기간 영향을 끼쳐오게 된다.
3.그리스 회의주의 학파의 논리학
이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카르네아데스와 클리토마쿠스이다. 이들은 점성술과 마술따위의 미신을 배격하고 개연성에 대한 건설적인 주장을 한다. 우리는 이른바 “회의주의적인 시각”에서 결코 확실성이란 개념을 믿을수는 없지만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 보다 상대적으로 더 진리일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개연성이 우리의 행위 기준이 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4.오컴의 논리학
오컴은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격언으로 유명하다. 그의 저서에 직접적으로 이 격언이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철학을 통해 충분히 이 격언의 개념이 표현되고 있다. 이 격언의 내용은 “적은 것으로 행할수 있는 일을 많은 것으로 행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로 잘 표현된다. 그는 논리학상에서 유명론자에 해당되며, 논리학은 자연철학의 도구라는 입장을 보였다.
사물들을 나타내는 명사를 일차적 명사라 하고, 명사를 나타내는 명사를 이차적 명사(예를 들면, 보편개념이나, 유, 종 따위)라 한다. 자연 과학에 있어서의 명사는 일차적 명사이고, 논리학에서의 명사는 이차적 명사가 되겠다. 다만 형이상학에서의 명사는 일차적 명사이기도 하고 이차적 명사이기도 한데, 오컴은 형이상학의 명사의 종류로 존재, 사물, 어떤 것, 하나, 참, 선의 여섯개를 거론한다.
5.프랜시스 베이컨의 논리학
베이컨은 근대 귀납법의 창시자로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귀납적 방법에 의해 보편적인 일반적 법칙에 다다를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즉, 먼저 관찰을 통하여 여러 개별 사례들을 수집하고 이를 통해 가장 낮은 차원인 1단계의 보편적 법칙을 얻는다. 여러 1단계의 법칙을 통해 2단계의 보편성을 획득하고 이런식으로 계속된다. 베이컨의 이같은 방법은 “가설”을 설정하지 않고 막연히 자료수집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그는 질서있게 자료를 수집 정리하면 가설이 자연히 밝혀지리라 기대했지만, 실제 과학에서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울러 베이컨은 연역법과 수학을 낮게 평가하였는데 이는 좀 지나친 감이 있다.
6.라이프니츠의 논리학
라이프니츠는 모든 명제는 필연적 명제와 우연적 명제로 나뉜다고 주장한다. 이중 전자만이 논리적 법칙에 따르며 존재를 주장하는 명제는 모두 후자에 속하는 것이다 (다만 신의 존재와 관련된 명제는 예외). 라이프니츠는 최초로 “가능태”에 대한 주장을 하였는데, 어떠한 하나의 세계는 그것이 논리적 법칙에만 어긋나지 않는다면 “가능”한 것이므로 무한한 가능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중 신은 가장 최선의 세계를 선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그는 최초로 현대적인 수리논리학에 가까운 논리학을 발견하였지만 그의 연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채 방치되었다가 수백년 후에나 알려진다. 이것은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존경으로 고전 논리학에 어긋나는 자신의 연구 결과에 대해 반신반의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연구들이 보다 일찍 출판되었다면 그는 수리논리학의 최초 창시자가 되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술어는 — 그것이 필연적이든, 우연적이든,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 그 주어의 개념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각 개인의 개념에는 그에게 일어날 미래의 모든 것이 이미 전부 포함되어 있는 셈이 된다. 이는 지극히 결정론적인 시각이므로 죄와 자유의지에 관한 기독교 교리와 상충되는 것이다.
7.흄의 논리학
흄의 전기 철학은 인식론으로서 지각으로부터 우리가 출발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고 믿는 실재적 대상들을 추리 할수 있는지 여부의 문제를 다룬다.
인간 정신의 지각은 인상과 관념으로 나뉜다. 인상은 뚜렷하게 각인되는 표상으로서 좀더 신뢰할수 있는 것이고, 반면 관념은 인상의 희미한 표상(image)에 머문다.
흄의 후기 철학은 귀납법의 문제로서 어떻게 우리가 직접 지각하여 확실히 기억하는 소수의 대상들로 부터 출발하여 이 광대한 세계에서 감관과 기억의 한계를 넘는 다른 많은 대상들을 믿게 되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흄이 말하는 개연성(probability)은 현대의 확률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이는 아직 관찰되지 않은 불확실한 지식, 즉 개연적 지식에 대한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되는 대상 자체에 원인성과 결과성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원인과 결과(인과관계)에 대한 지식을 부여 하는 것은 경험이다. 아무리 A, B 두 사건을 단독으로 관찰해도 인과관계가 발견되지는 않는다.
즉, 지난 경험에서 A,B가 연결되어 왔다면, 관념의 연합을 통하여 A의 인상은 B의 관념을 떠올리게 하며, 이 B의 관념이 B의 존재에 관한 신념을 만든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A와 B의 인과관계를 믿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양자사이의 필연성은 없는 것이다.
흄은 귀납법을 부정한다. 즉, 아무리 A와 B가 연결된 예를 여러번 보아도 연결되리라는 이유는 주지 못한다. 단지 그 기대의 원인이 될수 있을뿐이다. 인과관계에 대한 모든 추론은 습관에서 비롯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신념은 인간본성의 사색적인 작용이라기 보다는 감각적인 작용일뿐이다.
러셀은 흄의 논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흄의 회의주의는 귀납의 원리를 거부하고, 이 주장은 어떤 행위가 다른 행위보다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모든 노력을 마비시킨다. 따라서 특수한 관찰에서 일반적인 과학법칙에 도달하려는 모든 노력은 헛일로 만든다.
흄은 귀납법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한 대상 A에 뒤이어 다른 한 대상 B가 일어나는 것을 처음 보거나 혹은 처음으로 여러번 보게 될때 정신은 이 두대상 사이에서 근접의 관계 이외에는 다른 아무런 관계도 보지 않는다. 만일 경험이 좀더 충분하게 되고 또 A에 뒤이어 B가 거듭 계속 일어난다면 정신은 마침내 B의 관념을 다음에 나타날 A의 현상에 연합시키게 된다. 경험에 있어서의 규칙성(반복성)은 정신속에 습관을 만드는 것이다.
필연성에는 (관념속에서만 이루어지는) 논리적 필연성과 자연적 필연성이 있다. 20세기 이후의 철학(논리학)에서의 필연성은 논리적 필연성이며, “연역법은 필연성, 귀납법은 개연성”이라는 공식에서의 필연성도 바로 이 논리적 필연성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현대 논리학에서는 귀납법이 논리적 필연성을 갖추지 못한것으로 보는것이다.
하지만 흄은 자연적 필연성의 개념을 사용하여, 귀납법이 이것을 결여하였다고 본다. 이에 따라 흄은 필연성의 인상은 상상력의 산물이며, 사랑과 같은 느낌일뿐이라고 평가 절하하는 것이다.
8.칸트의 논리학
칸트는 라이프니츠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명제를 다음과 같이 분석적 명제와 종합적 명제로 엄밀하게 구분짓는다.
먼저 분석적 명제는 술어의 속성이 주어의 속성 일부가 되는 명제를 말한다. 예를 들어 “키 큰 사람은 사람이다.” 란 명제를 살펴보자. 주어의 일부(사람)가 술어를 구성하고 있다. 이 명제는 분석적 명제가 된다. 이 같은 명제는 필연적으로 참이 될수 밖에 없고, 주어만 “분석”해도 술어의 내용을 알수 있다는 의미에서 분석적 명제라 불리우는 것이다.
분석적 명제를 제외한 모든 명제는 결국 종합적 명제가 될것이다. 예를 들면 “키 큰 사람은 부자이다”는 종합적 명제가 된다.
칸트는 또 다른 차원에서 명제를 경험적 명제와 선험적 명제로 나눈다. 경험적 명제는 감각의 도움에 의해서만 진리값을 알수 있는 명제를 말하고, 선험적 명제는 순수 수학의 모든 명제와 같이 진리값의 판별을 위해 관찰활동이 필요 없는 명제를 의미한다.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은 어떤 명제가 종합적이면 반드시 경험적이며, 오직 분석적 명제만이 선험적일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칸트는 산수 혹은 기하에서와 같은 명제들은 종합적이면서 동시에 선험적일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7+5는 12이다” 란 명제를 살펴보자. 이 명제는 종합적이지만, 선험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술어인 12는 주어의 속성인 7, 5, + , 그 어디에서도 찾을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종합적이면서도 동시에 선험적인 명제가 어떻게 성립하는지가 칸트의 저작 “순수이성비판”의 한가지 주제이기도 하다.
9.헤겔의 논리학
헤겔의 논리학은 “변증법”으로 대표된다. 이 변증법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것이다.
정 – 전체(전체로서의 실재: Reality as a whole)는 아버지이다.
반 – 전체는 아들이다.(아버지가 있으면 아들이 있기 마련이므로)
합 – 전체는 “아버지 + 아들”이다.
정 – 위의 “합”이 여기서 다시 새로운 “정”이 된다.
반 – 전체는 할아버지이다.
합 – 전체는 “아버지+아들+할아버지”이다.
…이렇게 계속 진행된다.
변증법에 있어서 뒤따르는 모든 단계는 앞서간 단계를 포함하고 있다. 헤겔은 참과 거짓이 엄격히 구분되거나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그 무엇도 완전히 거짓이거나 완전히 참일수는 없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에 있어서 “진리는 곧 전체”이며, 어떠한 일부분도 완전한 참일수는 없다.
10.윌리엄 제임스의 논리학
윌리엄 제임스의 논리학은 한마디로 “실용주의적 논리학”이라 말할 수 있다. 그는 어떤 관념은 그것을 믿을때에 우리의 삶이 더욱 유익해질때 참(진리)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참된 관념이 실재와 일치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른 것이 되며 진리는 일종의 선(good)으로 간주된다. 결국, 제임스식 진리 판단법은 “1)무엇이 선인가? 2)결과가 무엇인가?”라는 2단계로 요약될수 있을것이다.
그는 인간 현상으로서의 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종교가 말하는 대상인 신(god)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다. 그는 신을 믿는 것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면 신을 믿는 행위를 방임하는 정도의 입장을 취했을뿐이다.
11.존 듀이의 논리학
존 듀이는 명제로 표현되는 믿음(belief)의 진리값 즉, 참과 거짓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대신 믿음의 좋고 나쁨을 중요시한다. 이 좋고 나쁨은 그 믿음에 이어지는 결과가 만족스러운지 여부에 달려있다. 예컨대, “오늘 내가 커피를 마셨다.(P)”라는 명제가 주어진다면, P의 결과와 ~P의 결과를 비교하여 더 만족스러운 명제에 대해 “좋다고” 판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P의 결과”에서의 “결과”의 판별 역시 재귀적으로 그 결과에 이어지는 결과에 대한 만족도를 판별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진리는 과거가 결정한다고 봄과 달리, 존 듀이는 진리– 그의 말에 따르면 보증된 주장 가능성 — 가 미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이처럼 존 듀이의 진리에 대한 세계관은 통념과는 다르다. 존 듀이의 이같은 궤변은 인간의 능력에 대한 강한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이 신념은 아마도 기계 기술과 과학의 발달에 의한 결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