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기독교와 같은 신에 대한 믿음에 기반하는 종교라기 보다는 이성적 학문체계에 가깝다. 구체적으로는 형이상학적 철학, 인간의 마음구조와 작동원리에 대한 심리학, 우주와 세계의 구조에 관한 천문학과 물리학이 종합되어진 종합 학문인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불교”라고 불리워지기 보다는 “불학”이라는 용어로 지칭되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글을 통해 나는 내가 이해하는 불교 교리의 핵심사항을 아주 쉽게 전달해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석가모니가 세기의 지성중 한사람이고 불교의 체계 역시 자랑할만한 동양 문명의 업적이기는 하지만, 그 교리에 수용하기에는 곤란한 결정적인 이성적 하자가 있기에, 불교 교리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사실 석가모니 사후 우리 인류는 지적으로 크나큰 진보를 했다. 불교교리의 대부분은 이제 과학으로 보다 세련된 해석이 가능하므로 불교 심리학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것 대부분이 무용한 것이 되버렸다. 요컨대, 불교와 석가모니에 대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어느정도 과대평가된 것이라고 볼수 있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먼저 석가모니 철학의 핵심 사항은 다음과 같다. 1)인생은 고통이다. 고통이란 굴레에서 벗어나는 — 즉 해탈에는 — 세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2)도덕적으로 사는 것, 3)모든 쾌락에의 집착을 버리는 것, 4)명상을 하는 것 이다.
첫번째, “인생은 고통”이라는 말은 의심할바 없이 설득력있는 말이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영원하지 않으며 우리는 언젠가 병들고 죽게 되는 생로병사의 운명에서 결코 벗어날수가 없다. 즉, 영원한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근본적인 고통속에서 일시적인 위안만이 일시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두번째, 석가모니는 이같은 고통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날수 있는 필수적인 세가지 방법을 제시하는데(참고로 이 방법들은 모두 실천해야 한다. 어느 하나만 선택적으로 실천해서는 완전한 고통에서의 해방은 어렵다 ), 그중 하나가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다. 여기서 도덕이라함은, 우리의 상식선에서의 도덕이라 봐도 무방하겠다. 즉,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고, 살생을 하지 않고 등등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의문이 든다. 대체 도덕과 삶의 고통 제거와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언뜻 볼때 양자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것이다. 이 의문은 이 글의 후반에서 풀어 보겠다.
세번째, 석가모니는 또다른 방법으로 모든 쾌락에서 벗어날것을 주문한다. 여기서의 쾌락 역시 상식적인 의미에서의 재물, 명예, 술, 성적 쾌락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쾌락에서 대체 얼마나 벗어나야 하는것일까? 적당히 알맞게 쾌락을 즐기라는 것인가? 아니면 조금의 쾌락도 허용하지 않고 단호히 배척해야 하는 것일까? 이 기준은 불교의 종파마다 다른 것 같다. 종파에 따라 모든 쾌락을 엄격히 금지하기도 하고 오히려 성적 쾌락과 같은 일부 쾌락을 해탈을 위해 적극 권장하는 생소한 종파도 있다. 물론 우리나라를 비롯해 대부분의 종파는 굉장히 엄격히 모든 쾌락을 금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짜피 이들 쾌락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며, 일시적으로 기쁨을 줄지라도 결국은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집착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의문이 든다. 어짜피 고통스러운 인생, 적당히 쾌락을 추구해서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절감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게 더 현명한 처사 아닐까? 모든 쾌락을 전부 금지한다는 것은 너무 극단적이고 융통성 없는 태도가 아닌가? 이 의문도 아래에서 풀겠다.
네번째, 석가모니는 해탈의 도구로서 명상을 말한다. 이 명상이 해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종파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명상을 자아성찰과 심리조절의 수단으로 보는데 반해 일본의 선불교에서는 명상을 통해 우리의 내부에 있는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한 어떤 진리, 즉 신비한 그 무언가와 조우할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두 의견중 석가모니의 의도는 무엇일까? 나는 신비주의적인 후자가 석가모니의 본뜻이라고 본다. 해탈의 방법이라는 거창한 주제를 논하는데, 석가모니가 단순한 심리 조절 기술로서 명상을 권한다는 것은 무언가 균형이 맞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양인들이 전자의 입장에서 명상을 바라보아 불교 교리에서 명상만을 쏙 빼어 수입해 적당히 가공하여 만든 것이 요새 유행하는 “마음챙김 명상”이다. 이는 좀더 학문적으로 연구 개발되어 수용전념치료(ACT)라는 꽤나 정교한 심리 치료 기술로 진화하기도 한다.
자 이제, 두번째와 세번째의 의문을 풀어보고, 왜 내가 불교 교리를 전적으로 수용하기는 어렵다고 보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지금까지 설명한 석가모니의 이론은 사실 모두 “윤회설”의 기반위에 서있는 것이다. 즉, 한사람의 인생은 현생으로서 끝이 아니라 돌고 돌아 환생하며 계속 고통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삶을 살고, 쾌락을 멀리하여 업보를 계속 제거한다면 언젠가는 고통의 사슬을 끊고 해탈을 할수 있다는 주장이다. 현생만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도덕적인 삶, 쾌락의 배척이 잘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윤회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석가모니의 의도를 이해할수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석가모니의 철학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겠다면 반드시 윤회설을 믿어야만 한다. 그의 교리는 윤회설의 기반 위에서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단, 마지막 명상을 서양인들처럼 심리 조절의 수단으로서만 사용하는 것은 어느정도 의미가 있다) 즉, 윤회설을 믿지 않는 어떤이가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내 삶은 왜 고통 스러울까 의문을 갖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이같은 불교의 “신비주의적인 측면” 때문에 불교의 교리 전부를 수용하기에는 곤란하다. 이 신비주의의 근거는 모두 석가모니라는 한 개인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개, 돼지로 환생할수 있다는 만화적인 상상을 아무 근거도 없이 믿을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명상을 심리조절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고려해봄직하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에 있는 현대 심리과학의 미흡함 덕분에 불교의 심리학적 측면은 아직도 제법 유효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