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행복의 정복 (이순희 역)
행복에 대한 바이블. 외형적으로는 쉬워 보이지만, 먼저 이해한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책이므로 사실은 어려운 책이다. 러셀답게 불필요한 신비주의를 모두 걷어낸, 실용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그래서 그의 말은 모두 사실로 믿겨진다. 그래서 이 책이 시시해보이지만 시시하지 않은 것이다.
추가: 일본의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가 그의 저서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에서 밝힌 본 책에 대한 짧은 평가를 아래에 소개한다.
러셀은 또한 독자적인 방법으로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구상한다. 이는 그가 쓴 계몽서중 하나인 <행복론>(1930)에 드러난다. 이책은 문고판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일본에서도 손쉽게 구할수 있지만, 그만큼 많이 읽히지는 않는 듯하다. 어쩌면 행복이라는 주제가 너무 쉬워서 지적 자극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도 한 가지 이유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은 실로 날카로운 시대 의식을 근거로 쓰였기 때문에 이는 너무 성급한 판단이다.
2.결혼과 도덕 (이순희 역)
결혼과 사랑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러셀은 회의주의적인 시각으로 사랑과 관련된 기존의 윤리관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합리적으로 비판하고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3.러셀, 북경에 가다 (이순희 역)
러셀이 본 긍정적인 동양, 특히 중국을 알수 있는 책. 100년전에 쓰인책이지만 놀랍게도 현 시대에도 그대로 유효한 책이다. 진정한 중국을 이해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다.
4.인생은 뜨겁게 (송은경 역)
러셀의 말년에 쓰여진 자서전.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그의 인생이 담겨 있다. 지성의 인도하에 사랑으로 충만했던 그의 삶을 통해, 위대한 지성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5.철학의 문제들 (박영태 역)
인식론, 과학철학, 언어철학등 몇가지 철학적 주제들을 입문자 수준에서 짧게 다루고 있는 책. 여기서 입문이라함은 러셀의 입장에서의 입문이므로, 실제로는 대중이 읽기에 어려운 전문 학술서로 분류된다. 러셀의 전문적인 철학을 짧게 나마 맛볼수 있는 좋은 책이다.
6.게으름에 대한 찬양 (송은경 역)
제목은 마치 “느린 삶의 즐거움”을 설파하는 가벼운 대중 심리학책과 같은 느낌이지만, 사실은 “행복한 삶”이란 큰 주제를 개인적 차원에서 부터 사회적 차원까지, 정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학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짧게 짧게 논하고 있는 에세이집이다.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러셀이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하루 4시간 노동을 주장하고 있는 글이다. 이는 AI와 로봇의 발전에 따른 기본소득제가 논의되고 있는 현 시점에 여전히 유효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러셀의 놀라운 통찰력을 느낄수 있는 부분이다. 모든 글이 읽을만한 가치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사회주의의 기본 개념을 다질수 있는 글, 행복과 관련지어 아동교육을 설명한 글, 심신문제와 관련된 유물론적 논의의 글이 특별히 좋았다. 다만 번역이 약간 미흡한 것이 아쉬운 점이나(스토아 주의를 금욕주의로 쓸데없이 친절하게 번역한 부분이 특히 그러하다) , 내용의 이해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니 큰 문제는 아니다.
7.러셀의 시선으로 세계사를 즐기다 (박상익 역)
러셀의 “Understanding History”란 에세이집의 일부 글을 편역한 얇은 책이다. 그나마 책의 절반은 서양사학자인 역자의 미주 형식의 해설로 구성되어 있어 실제 러셀의 글이 수록된 부분은 매우 짧다.
책 전체의 주제는 우리의 인생과 관련지어 “역사 학습의 필요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난 제목을 보고 세계사적 지식을 전달하는 내용인지 알았는데 이러한 내용은 기대보다 간소한 편이라 처음엔 약간 실망을 했다. 하지만 결국 러셀의 역사학적 측면에서의 “인생론”이 되버리게 된 결론도 나름 괜찮은 것 같다.
책 내용이 쉬운지라 번역은 준수한 편이지만, 성급하게 달거나 내용을 잘못이해하여 달아 놓은 역자의 주석이 몇개 있어서 약간은 신경쓰인다. 하지만 역자의 전공분야인 서양사적 지식을 수록한 미주의 내용은 나름 유용하여 이 같은 단점이 상쇄된다.
8.러셀의 교육론 (안인희 역)
러셀의 “On Education”의 완역본이다. 사실 러셀의 다른 책 보다 그 유명세가 덜한 책인데, 나는 이 책을 러셀의 대중서들중에서 가장 뛰어난 하나의 책으로 꼽고 싶다. 제목이 책의 내용을 완전히 포섭하지 못한다고 볼수 있는데, 이 책은 <행복의 정복>에서 다루는 행복의 문제를 형식적으로는 교육적 측면에서, 내용적으로는 좀더 심화해서 다루는 책이라고 볼수도 있다. 나는 <행복의 정복>, <게으름에 대한 찬양>, 그리고 이 책을 묶어 “러셀의 행복론 3부작”이라고 부르고 싶다.
책의 주제는 간단히 말해서 “지성과 사랑의 중요성”이다. 이를 개인은 물론 사회적인 차원에서의 교육론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책의 골자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경우에 따라 당신의 부모가 그들의 무지속에서 얼마나 당신의 인생을 망쳐왔는지라는 상당히 색다른(?) 경험도 할수 있다. 이처럼 이 책은 자녀 교육은 물론이고 다 큰 성인을 위한 스스로의 인생 교육론으로서도 가치를 지닌다. 사회의 진보와 개인의 건강한 삶을 위해 부모는 물론, 모든 성인이 꼭 읽어야 하는 필독서다.
다만 아쉬운 점은 번역인데, 단어의 부적절한 번역은 물론, 기초적인 주술 호응관계도 틀려서 문장이 어색한 부분이 종종 눈에 띈다. 솔직히 내용이 그리 어려운 책이 아님에도 번역이 좋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극악의 번역은 아니니 훌륭한 내용을 고려한다면 기꺼이 참고 읽을 만하다. 추후 좀더 좋은 번역으로 재판되길 기대해 본다.
9.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이순희 역)
개인적으로 러셀의 에세이중 최고로 뽑고 싶은 책이다. 먼저 욕구와 충동이라는 두 개념을 사용하여 러셀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인간 심리를 해부한다. 이를 바탕으로 개인에서 사회의 문제로 나아가는데, 대표적으로 자본주의와 전쟁의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이같은 문제를 극복할 새로운 사회를 재건하기 위한 원리를 교육, 노동등의 여러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러셀이 제시하는 이상적 사회는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기존의 사회주의국가를 뛰어넘어 인간의 창조성을 육성하여 행복의 원리를 실현하는 국가를 지향한다. 마지막으로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연대하여 함께 행동하자는 선언적 성격의 매니페스토로 끝을 맺는다.
10.나는 이렇게 철학을 하였다 (곽강제 역)
러셀의 “철학적 자서전”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책의 원제는 “My Philosophical Development”이다. “나는 이렇게 철학을 하였다”라는 철학적 자서전에 어울리는 제목을 붙여 놓았는데, 나는 이 한국어 제목은 책의 내용을 오해하게 만드는 좋지 못한 제목이라 생각한다. 원제에 충실하게 “나의 철학적 발전”이나 혹은 “나의 철학” 정도가 적절하다고 본다. 이 책은 철학적 “자서전”이라기 보다는 러셀 본인이 자신의 철학을 직접 요약해놓은 “요약사”라 보는 것이 적당하다. 따라서 책의 내용은 주로 분석철학과 언어철학 그리고 과학철학 일부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책의 내용은 대단히 알차고 러셀 철학의 진면목을 볼수 있는 가치있는 책임에 분명하나 번역이 별로 좋지 않다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 차후 다른 번역자가 제대로 번역한 책이 나오길 바라는 보지만 한국의 출판 시장상 헛된 희망일 것이다. 아울러 책의 끝부분에 러셀의 친구이기도 했던 알랜 우드의 논평글이 부록으로 실려있다. 이 글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수확이었는데, 러셀의 사상에 대해 간명하고 독창적으로 설명해 놓은 글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러셀의 자서전에서도 나오듯 알랜의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이 글은 원래 계획했던 분량에 한참 못미치는 서두 부분만 씌여진채 미완성으로 남겨진다. 완전히 완성되었다면 러셀을 이해하려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을텐데 참 아쉬운 일이다.
추가 정보: 알랜 우드가 “Bertrand Russell : The Passionate Sceptic” 이란 제목으로 단행본을 출간한 것을 발견했다. 내용을 대략 살펴보니 아쉽게도 러셀에 대한 평전에 가까운 책이라 그의 철학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논의는 거의 없는 것 같다.
11.과학의 미래 (석기용 역)
러셀은 대륙의 합리론과 상반되는 영국의 경험론적 철학자라 볼수 있는데, 더 나아가 그는 철학자임에도 과학을 철학보다도 상위에 놓는 듯한 발언을 자주 하였다. 이 책은 그가 과학에 대하여 교양있는 대중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내놓은 책이다. 전반부에는 과학사와 과학철학적 내용을 바탕으로 과학의 의미(주로 철학과 대비되는)와 그것의 가치에 대하여 설명하고, 후반부에는 그가 상상하는 미래의 과학화된 사회에 대하여 보여준다. 이 후반부 상상이 재미있는데, 일부는 실제로 현대의 사회에서 이미 실현된 부분도 있어 그의 예리한 통찰력과 상상력을 느끼게 해준다. 책의 마지막에는 권력추종적 과학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으로 지성의 인도를 받는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12.상대성 이론의 참뜻 (김영대 역)
“The ABC of Relativity”를 번역한 책으로, 당대에도 일반 대중들에게 까지 큰 화제가 되었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명하고, 그것이 가진 철학적 함의에 대해 간단히 논평하는 글을 담고 있다. 초판은 1925년에 간행되었으나, 본 역본은 펠릭스 피러니가 러셀의 허가를 얻어 상당수 내용을 수정한 제4판을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순수하게 러셀의 생각만을 담고 있지 않다고 볼 여지도 있지만, 펠릭스 피러니도 물리학자로서 충분한 역량을 가진 사람이고, 러셀의 허락하에 그간 과학의 발전을 반영하여 신중히 개편작업을 한 것이므로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된다.
책의 구성은 먼저 상대성 원리를 러셀 특유의 비유법을 사용하여 수식을 최대한 배제한채 가능한 쉽게 설명하고, 과학 철학적인 지식을 간단히 소개한후, 상대성 원리가 지닌 사회적, 철학적 의미를 러셀의 “과학본위적인 경험론적” 시각에서 풀어보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의 내용 자체는 나름 좋으나(사실 후술할 이유로 인하여 정말 좋은 것인지 정확히는 판단할수 없다고 해야 솔직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중대한 문제는 번역이 심각하게 나쁘다는 점이다. 비문이 쉴세 없이 나오며, 어색한 단어의 사용등이 책의 이해를 크게 방해하고 있다. 현재는 절판된 상태인데, 향후 제대로된 번역본으로 다시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13.서양철학사 (최민홍 역)
러셀의 시각에서 서양 철학자들의 사상을 살핀다. 그의 경험론과 평화주의적인 시각이 많이 배어있는 책인데, 예를 들면 헤겔, 니체등에 대한 평은 박한 편이고 그에 반해 로크등의 경험론자에 대해서는 후한 평을 내린다. 세간에는 러셀의 주관이 많이 들어갔다는 것을 이 책의 단점으로 뽑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러셀도 책의 서두에서 밝히고 있는데, 완전히 객관적인 철학사라는 것은 존재할수 없기 때문에 애매모호한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이 책처럼 떳떳하게 주관을 밝히는 철학사 책이 더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책을 따라 읽으며 세기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짚어 올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러셀의 합리적 사고 방식을 이해하고 훈련할수 있게 된다. 일종의 지적 트레이닝이 되는 것이다. 아울러 러셀은 철학자가 당대 사회 문화의 산물이자 원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 책에는 시대에 따른 사회 문화의 변천사에 대한 내용도 풍부하게 담고 있다. 또한 서양 문명의 핵심인 기독교 신학에 대한 내용도 많이 소개 하고 있어 기독교에 대한 신뢰할수 있는 자료로도 유용하다.
번역은 오래전 번역이고, 썩 좋다고 할수는 없는데 읽는데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최근에 다른 출판사에서 새 번역본들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직접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최신 번역본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14.인기 없는 수필 (최광렬 역)
각기 다른 시기에 집필된 에세이 여러개를 묶어 놓은 에세이집인데, 개인적으로 특별히 좋았던 장은 “교사의 사명”이란 이름의 9장과 “인류의 장래”란 이름의 10장이다. 9장에서 “교사”는 사실상 “지식인”이라고 치환해도 무방해 보인다. 지식인의 바람직한 역할에 대해 잘 밝혀놓았다. 10장은 냉전시절 러셀의 반전론에 관해 설명한 부분인데, 미국이든 소련이든 어쨋든 하나의 국가가 패권을 쥐는 것이 최선은 아니지만 평화를 위해서는 바람직하다는 독특한 주장을 한다. 어찌보면 권력을 대단히 긍정하는 듯한 발언이라 다른 문헌들과 모순되 보이기도 하다. 러셀은 어떠한 주제에 대하여 유연하게 입장이 변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이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책의 내용은 더할나위없이 좋으나 안타까운것이 번역이 매우 좋지 않다는 점이다. 아주 오래전 번역본을 재판한 것 같은데, 다른 출판사에서 다른 번역자가 번역한 판본도 있는 것 같다 (이 판본은 불행히도 절판된 상태다). 구할수만 있다면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이 이 책보다는 더 낫지 않을까 싶다.
15.러셀, 마음을 파헤치다 (박정환 역)
러셀의 “The analysis of mind”를 완역한 책이다. 이 책은 러셀의 아주 중요한 저작중 하나인데, 우리나라에는 그간 한번도 번역된 바가 없었다가 얼마전에야 출간되었다. 일단 이렇게 중요한 자료를 번역해준것만도 역자에게 고맙게 생각하지만 솔직히 번역의 질이 좋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오역이나 문장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많이 눈에 띄며, 제대로 독해하기 위해서는 원서와 함께 읽어야만 한다. 그래도 돈이 안될것임에도 이런 책을 번역해준 역자의 노고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책의 제목을 마치 요새 유행하는 대중 심리학책스럽게 붙여놓아 오해가 생길 것 같다. 이 책은 심리철학에 대한 전문철학서라 일반인이 읽기에는 많이 어려운 책이다. 심리철학 뿐만아니라 언어철학, 논리학, 과학철학, 인지과학에 대한 내용도 담겨있으며 심지어 현대 인공지능 기술(딥러닝, 강화학습, 데이터 과학등)에 모티브가 될수 있는 통찰도 찾아볼수 있다.
러셀은 정신과 물질 어느 한쪽에 편향되지 않고 절충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신경과학에 기반을 두는 현대의 심리철학 서적을 읽으면 지식이 더 확장되는 경험을 할수 있을것 같다. 이런 목적으로 처칠랜드 부부의 책(뇌과학과 철학, 플라톤의 카메라 등이 한국에 출판되어 있다)을 추천한다.
16.러셀의 철학노트 (최혁순 역)
러셀의 이름으로 나온 최후의 저작으로, 사망 직전에 출간된 “Dear Bertrand Russell”의 완역본이다. 이 책은 수십년간 러셀이 주고 받았던 서신을 모아놓은 독특한 책인데, 그 대상이 초등학생부터 90세 노인까지, 평범한 일반인에서 저명한 학자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다. 편지의 주제도 좋아하는 노래등을 묻는 지극히 사적이고 소박한 것에서 전문 학술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짧은 편지글이라 내용이 깊지는 않으나 내밀한 편지글의 형식을 통해 러셀의 진솔한 면모를 엿볼수 있다는 점에서 의외로 중요한 자료라 말할수 있겠다. 그와 동시대를 산 덕분에 이렇게 직접 편지를 주고 받을수 있었다는 점은 대단히 부러운 일이다.
17.교외의 사탄 (신혜연 역)
러셀이 말년에 쓴 두권의 소설중 하나이다. 미스테리 혹은 SF장르의 짧은 단편소설 몇개를 모아놓은것인데, 러셀의 철학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부각되게 녹여놓았다. 이말은 사실 문학적인 소설로서의 가치는 약간 떨어진다는 것이 된다. 러셀이 전문 소설가는 아니고,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소설 집필 계획 자체가 “약간의 외도와 기분전환” 같은 취지였으므로 이해할 만하다. 그래도 대철학자의 소설이니 나름의 신선함이 있는 책이다. 말미에 딸려있는 역자인 신혜연씨의 해설도 여러 자료들을 꼼꼼히 모아 작성되어 가치가 있다.
18.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 (김경숙 역)
1차세계대전 직후에 쓰여진 에세이집으로서, “합리적 회의주의”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성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는 책이다. 당대에는 전쟁의 영향으로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론이 크게 대두되었는데 러셀은 이같은 주장에 맞서, 오히려 우리가 더욱 이성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반론을 펼친다. 책의 말미에 있는 미래에 대한 예측과 상상 부분은 러셀이 쓴 <과학의 미래>보다는 완성도가 약간 떨어지는 느낌이다. 두 책사이는 3년여의 시간차이 밖에 없는데 약간 의아한 부분이다. 전체적인 번역상태는 큰 무리가 없는 수준이지만, 역자가 무리해서 각주로 붙여놓은 해설중 일부는 품질이 떨어지고 러셀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 못한듯 보이는 부분도 있다.
19.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이순희 역)
이 책의 원제는 “Bertrand Russell’s Best”인데, 이름 그대로 러셀의 여러 저작들중 대중적으로 의의를 갖는 핵심적인 부분들을 발췌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정치, 심리, 종교, 윤리 등, 편집자가 각 분야에 맞추어 좋은 구절들을 뽑아 소개하고, 분야의 서두와 말미에는 편집자의 논평을 담았다. 이 논평이 객관적인 시선에서 러셀의 철학을 검토하고 있으므로 나름의 의의가 있다.
20.권력 (안정효 역)
이 책은 러셀 스스로가 자신의 책중에서 가장 우수한 사회학적 도서로 자평했던 책이다. 약 100년전의 영국과 유럽대륙의 정치적 상황을 중심으로 서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현 상황과 너무나도 일치하게 오버랩이 되어 보면서 놀라움을 감출수 없었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은 시대와 지역을 관통하는 공통분모를 가질수밖에 없는 것 같다. 러셀은 이책에서 권력욕의 본질을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에서 밝히고, 그것을 마냥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다루어 “결과적”으로 좋은 타협점을 낼수 있을지에 대해 말한다. 아쉬운점은 번역이 좋지는 않다는 점인데, 번역자인 안정효씨가 번역가와 소설가로 유명한 분이라 개인적으로 기대가 컸던 탓에 이 아쉬운점이 좀더 크게 느껴졌다.
21.서양의 지혜 (이명숙, 곽강제 역)
러셀이 말년에 쓴 또다른 철학사 책이다. 먼저 출간되어 더 유명한 “서양철학사”가 있음에도 러셀이 이 책을 집필한 의도는 보다 더 컴팩트하고 그림들을 곁들여 좀더 쉽게 다가갈수 있는 책을 쓰겠다는 것인데, 그렇다고해서 이 책이 단순히 서양철학사의 요약판이거나 열화 버전 같은 것은 전혀 아니다. 사실상 두 책은 완전히 다른 책이라 보아야 한다.
두 책의 가장 큰 차이는 세가지인데, 첫째는 이 책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해 양적으로나(책의 반절을 할애한다), 질적으로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다. 러셀은 모든 서양의 지혜의 근원이 이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된다고 보는것 같다. 즉, 어떤 휘황찬란한 현대 철학도 따지고 보면 그 원류가 그리스의 어떤 사상가라는 식이다. 이 책이 저술될 당시 즈음에 철학계는 러셀의 제자인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의 영향으로 기존의 철학적 전통이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경향을 러셀은 바람직하지 않게 보아 그리스철학의 전통이 가진 중요성을 이 책에서 강조했던것 같다.
둘째는 전작인 서양철학사에서 다루지 못했던 좀더 현대의 역사적 배경과 철학사가 업데이트되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프랑스 실존주의에 대한 내용이 많이 추가되어 도움이 되었다. 셋째는 탐구자가 가져야할 “건강한 정신”을 촉구하는 러셀의 사상이 책 전반에 걸쳐 더 강하게 깔려있다는 점이다. 이 정신은 “과학철학”에서 많이 다루어지는 류의 과학적 탐구 정신 같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서양철학사보다 설명이 더 유기적이고 자세하여 나는 이 책이 서양철학사보다 더 마음에 든다.
22.논리와 철학 (곽강제 역)
이 책은 곽강제 전북대 철학과 교수가 직접 선정한 여러편의 논리학 관련 논문들과 자신이 직접 쓴 논문 두편을 묶어 놓은 것인데, 러셀의 논문이 3편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논문들이 전부 유익하고 소중한 것들이다. 내가 아마도 전국에 남아있는 마지막 신권을 산 것 같은데 절판되어 아쉬운 책이다. 러셀의 논문들만 간단히 살펴보자면, 먼저 “철학의 본질로서의 논리학”이란 제목의 논문에서는 주로 논리학의 역사 일부와 현대 논리학의 발전에 대해 설명하고 특히 헤겔 논리학의 허위성과 신비주의자들의 심리적 특성과 오류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둘째로 “신비주의와 논리”란 제목의 논문에서는 말 그대로 신비주의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러셀은 가히 신비주의 비판의 결정판이라 할만한 분석을 보여준다. 특히 여기서 러셀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하여 통찰하는 “시간개념”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석가모니의 그것을 능가하는 대단한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수학과 형이상학자들”이란 논문은 수학과 논리학의 관계에 대하여, 러셀 본인의 “수학은 근본적으로 논리학이다”라는 지론에 따라 짧게 논하고 있는 논문이다.
23.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송은경 역)
대중적으로 <행복의 정복>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러셀의 에세이집이다. 개인적으로 제목이 별로 좋지 못하다고 보는데 지나치게 “무신론 교과서”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종교에 관한 이야기가 많긴하지만 이 책은 근본적으로는 “자유로운 지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이기에, 책의 주제를 제대로 반영한 제목은 “자유로운 사상에 관하여” 정도가 되겠다.
러셀의 대표작이라고 할만큼 어느 글 하나 빼놓을것 없이 모든 글들이 좋은데, 개인적으로는 특히 “나는 이렇게 믿는다”란 글과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란 토론글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는 러셀의 과학적 인생론과 행복론을 간결하게 잘 정리한 글로서 가치가 크다.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는 코플스턴 철학사로 유명한 신학자 코플스턴 신부와의 토론을 그대로 기록한 글인데, 세기의 두 지성이 보여주는 제대로된 토론 문화와 기법의 진수를 맛볼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한 글이다.
재미있는 것이, 즉흥적인 토론이라서 그런지 정리된 글에서 만나는 러셀보다 그 예리함이 다소 떨어져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이 토론에서 러셀보다 오히려 코플스턴 신부의 주장이 약간 더 설득력 있게 보였다. 코플스턴은 매번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러셀을 공격하고 있으나 그에 대한 러셀의 대응은 누락된 설명에 기반하여 설득력이 약간 떨어져 보인다.
24.악몽 (신혜연 역)
앞서 읽었던 “교외의 사탄”과 더불어 국내에 세트로 출판되었던 러셀의 소설집이다. 개인적으로 교외의 사탄보다 상대적으로 낫다고 보는데, 좀더 세밀하고 진지하고 깊이가 더해졌다. 책은 “악몽”을 소재로 옴니버스식으로 쓰여지 여러개의 단편을 수록하고 있고, 마지막에는 “자하토폴크”와 “믿음의 산”이라는 제목의 살짝 분량이 긴 두 소설이 실려있다. 나는 이 마지막 두 소설이 좋았는데, 종교와 믿음에 관한 러셀의 평소의 주장을 SF스타일의 가상 이야기로 풀어낸 작품들이다.
교외의 사탄에서도 그러했지만 이 책에서도 역자인 신혜연씨는 꼼꼼하고 성의있는 후기를 썼는데, 단순히 형식상 양을 채운것이 아니라 직접 풍부한 자료 조사를 거친 유익한 후기를 들려준다. 내가보기에 이것은 러셀에 대한 역자의 진실된 애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작업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