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민족주의의 혼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감상주의자들이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의 전쟁이나 이번 이스라엘과 하마스간의 전쟁에 과거 일제시대의 대립구도를 직접 대입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와 하마스를 100년전 조선과 같은 약소국으로 바라보고 은근하게 이들을 동정하고 지지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이는 어리석은 발상이다. 두가지 이유에서 그러한데, 먼저 이들이 사고의 기반으로 하고 있는 “민족주의” 자체가 완전히 허구의 잘못된 개념이라는 점, 다음으로 “전쟁”이라는 상황을 낭만적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서는 후자에 대해서만 간단히 살펴보자.
전쟁은 원칙적으로 승자와 패자, 악당과 영웅이 없는, 이성이 마비된 혼란한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단순하게 상대적 대국인 러시아와 이스라엘을 “악당”으로 간주하는 것은 대단히 성급한 발상이다. 어떤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는 최소한 수십년간 복잡한 사건들이 모여 인과관계를 이루게 되고 이 관계는 사실상 해명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누가 악당이고 누가 영웅인지 판단하기가 극히 곤란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이라는 사건 자체가 대단히 “비정상적인” 상태에 놓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시기에 전쟁 당사국들의 국민들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서로를 “합법적”으로 죽이기 위해 전력을 다하게 된다. 아이러니 한 것은 각국의 수뇌부는 거의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나 러시아의 푸틴은 안락한 곳에서 목숨을 지킬수가 있다. 죽는 것은 전쟁과 관련한 어떠한 결정권도 가지지 못했던 일반 시민들이나 하급 군인들 뿐이다. 이렇게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이들의 죽음은 국가를 위한 영광으로 칭송받는다. 세간에는 젤렌스키가 마치 우리가 본받아야할 민족의 영웅이나 지도자의 모범이라도 된듯이 여기는 자들이 있는데,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그는 푸틴과 똑같은 그저 나르시시즘에 심취한 전쟁광일뿐이다.
이렇게 이성이 마비되는 전쟁이라는 예외적 상황이 계속 빈발하게 되면, 비이성적 상황에 대한 허용치가 점차 낮아지게 되고, 그만큼 전 세계는 비이성적인 공간으로 변해가게 된다. 예외가 이제는 원칙이 되버리는 것이다. 전쟁을 바라보는 가장 현명한 시각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최대한 신속하게 전쟁을 끝낼수 있을까”를 궁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