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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심은 예술을 해치는 대단히 유해한 요소다. 이 유해성은 예술작품의 창작자와 수용자를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 평론을 하고 있는 이동진씨가 그의 저서 “이동진 독서법”에서 지적 허영심이 필요하다는 긍정론을 펼친 사실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이동진씨는 이 책 뿐만 아니라 여러 인터뷰에서 일관되게 지적 허영이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자주 펼쳤던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주장에는 논리적인 결함이 있으며, 무엇보다 대단히 해로운 발상이라 말할수 있겠는데, 이 글에서는 이동진씨의 상기 주장에 대해 무엇이 문제인지 간단히 분석해보겠다.
먼저 이동진씨가 해당 저서에서 펼친 주장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책 읽는 이유? 이동진의 솔직한 고백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자주 ‘있어 보이니까’라고 농담처럼 답하기도 합니다.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이유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있어 보이고’ 싶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라는 걸 전제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것’을 보이고 싶어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이면 허영이죠. 요즘 식으로 말하면 허세일까요. 저는 지금이 허영조차도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정신의 깊이와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래서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즐기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빈 부분을 메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적 허영심일 거예요.
출처 : 이동진 독서법 59쪽
위 주장을 논의의 편의상 아래와 같이 간단히 요약해 보았다.
a. 허영심은 있어 보이고 싶은 것이다.
b. 그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c. 이 허영심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는 노력을 하게 만든다.
d. 따라서 허영심은 좋은 것이다.
이제 이동진씨의 오류가 무엇인지 분석해보자.
주장 b에서 이동진씨는 행간에 지적 허영자들의 “알고있음”이 마치 소크라테스의 격언 “네 자신을 알라”와 같은 “자아의 직시”라도 되는것처럼 전제하고 있다. 물론 양자는 똑같이 “안다”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그 뜻은 완전히 다른것이다. 여기서 이동진씨는 논리학상의 일종의 “은밀한 재정의의 오류”를 의도적으로 혹은 실수로 저질렀다.
우리가 주장 a에서 유심히 살펴야 할 핵심은 “보이고”라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동진씨는 “보이고”가 아닌 “있어” 부분에 주목을 하고 있다. 쉽게 말해, 지적 허영심의 핵심은 타인을 의식한다는 것이지 이동진씨의 주장처럼 “지식을 갖고 싶다”가 아니다. 지적 허영자가 만약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간다면 허영심의 성향은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책을 읽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을것이다. 왜냐하면 남에게 잘보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지적 허영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는 노력이 아니라 타인에게 잘보이기 위해 단편적인 지식을 피상적으로 암기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물론 이동진씨는 이러한 피상적 지식이라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반박할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고, 이런식의 지식 습득은 안하니만 못한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과정은 개인에게 지극히 해롭다. 그 이유에는 다음 세가지가 있다.
첫째, 이러한 피상적 지식은 말 그대로 남에게 자랑을 하기 위한 것인데, 그나마 조금이라도 교양이 있는 사람에게는 쉽게 간파당하여 먹히지도 않을 지식이다. 그렇다면 뭐하러 귀중한 인생을 낭비하며 이러한 지식습득에 열을 올리는가? 도전 골든벨 퀴즈쇼라도 나갈 참인가?
둘째, 피상적 지식은 자신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을 유발한다. 심지어 지적 허영자가 가진 허영심은 이러한 착각을 더욱 증폭시킬것이다. 이와 관련한 위험성은 이미 익히 알려져 있는데, 이를테면 “책 한권 읽은 자가 제일 무섭다”라던지, “위험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다는 착각이다” 와 같은 격언들, 그리고 크루거 효과 같은 심리 실험으로도 입증되어 있다.
셋째, 허영심은 치료되어야 할 일종의 정신질환이다. 이동진씨 말처럼 이들은 자기자신을 잘 아는 사람들이 전혀 아니며,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과대평가된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에 부흥하기 위하여 억지스러운 지적 욕심을 갖는 자들에 불과하다. 이러한 정신상태의 인간은 도저히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동진씨는 치료되어야 할 문제를 오히려 부추기고 있으니 참 딱한 노릇이다. 물론 누구나 어느정도의 지적허영심은 가질수 있으며 허영심이 전혀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허나 어쩔수 없는 허영심을 수용하는 것과, 이동진씨처럼 허영심을 미화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지적 허영자가 해야할 노력은 피상적 지식의 조각따위나 외우며 자위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욕심을 솔직하게 직시하고 그것을 떨구어 낼수 있는 진짜 지식을 쌓는 일이다. 이런식의 노력을 통해 지적 허영자가 아닌 진정한 지식인으로 거듭날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짜 노력은 이동진씨가 주장하는 노력처럼 억지스럽고 고통스럽지 않고 즐거울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정신상태가 개선되는 것을 스스로 느낄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통한 유익함에는 정말이지 다양한 차원들이 존재하는데, 이동진씨가 주장하는 “허영심의 만족”은 그중에서 가장 저차원적인, 아니 오히려 그것의 반대급부되는 해로움이 너무나도 크기때문에 유익함으로 분류될수도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책이 주는 더 높은 차원의 유익함을 일말이나마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애당초 이동진씨와 같은 주장은 감히 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동진씨는 그가 주장하는 허영심이외의 차원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처럼 보인다.
대중적으로 이동진씨가 영화평론가로서 인지도가 높은데, 그의 여러 활동들을 — 영화 별점평 매기기, 화려한 수사에 치우친 빈약한 영화평들 — 철학자 겸 영화학자인 노앨 캐럴의 기준에 따라 평가하자면, 그는 영화평론가라기보다는 “영화 소비자 리포터”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유명세에 비하여 정작 그의 말들은 논리적 오류도 빈번하고 그닥 영양가가 있어보이지는 못한 것 같다. 그의 발언들을 유심히 들어보면 몇가지 개념들을 비약적으로 연결시키고 특유의 시적인 표현으로 비약의 과정중에 발생하는 논리적 오류들을 멋지게 포장하여 가리는 수사학적 화법을 자주 사용한다.
점점 내실없이 가벼워지고 쉽고 자극적인 것만 추구하는 세상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이들이 가지는 지적진정성은 매우 중요하다. 영화평론가라는 직업도 나름의 지적전통을 가지는 지식인이라고 볼수 있겠는데, 이 영역도 부실한 사람들의 부실한 활동들로 채워져 오염된지 오래인 것 같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결국 관객들의 의식이 중요한데, 단지 누군가가 유명하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말을 아무 비판 의식없이 덜컥 받아 들이지 말고, 과대평가되지 않은 진짜 평론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관련 글로 가기 : 이동진 독서법을 지지하는 니체의 글?(외부사이트)
“물론 이동진씨는 이러한 피상적 지식이라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반박할것이다.”
이동진은 그렇게 반박하지 않을겁니다.
시작하는 동기로서 허영심의 긍정이라고 이해 하는 것이 따뜻한 시선 아니겠습니까. 그것으로 시작하면 충분하다는 의미.
허영심의 태도를 일상에서 유지하는 것에 당연히 반대하실 분입니다.
이 글은 불필요한 공격성으로 느껴집니다. 오히려 본인이 이동진의 허수아비를 무찌르며 허영을 느끼는게 아닐까요?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아래와 같이 답변 드립니다.
1.제가 위 글을 작성하며 허영을 느꼈는지 느끼지 않았는지 여부와 위 글의 진위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 입니다. 글 작성시의 작성자의 감정과 글의 진리값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론 저는 “이동진의 허수아비”가 아니라 “이동진 본인의 모습”을 대상으로 글을 작성한 것입니다.
2. 설사 이동진씨가 피상적 지식이라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반박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다시 말해 해당 부분을 위 글에서 완전히 빼버려도 위 글의 논증에는 영향이 없으며, 오히려 이동진씨의 반박거리 하나가 줄게 되므로 이동진씨에게 불리합니다. 저는 이동진씨와 만나서 토론하는것이 아니므로 의도적으로 이동진씨에게 유리하게 해당 문구를 넣은 것입니다.
3. 위 글 전체가 “시작하는 동기로서의 허영심의 긍정”을 반대하는 글입니다. 따라서 이동진씨의 주장을 따뜻하게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따뜻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반박하고 싶다면 위 글의 각 부분을 근거를 들어 비판하셔야 하지 단순히 반대 명제를 서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4. 저는 이동진씨의 일부 활동에서 불필요한 허영심을 느꼈기 때문에, 이분이 허영심의 태도를 일상에서 유지하는 것에 진심으로 “당연히” 반대할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물론 겉으로는 당연히 그렇게 말씀하시겠지만)
5. 위 제 글이 다소 공격적으로 느껴질수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글의 작성 배경을 참고하시는 것이 좋을듯 한데, 1)위 글은 제가 영화에 한창 관심이 많은 시절에 작성되었고 2)저는 평론가로서의 이동진씨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며, 3)독서의 가치를 무척이나 높게 보는 사람입니다. 이 세가지가 만나 공격성이 만들어진것 같군요.
참고로 위에서 2)와 관련하여 아래 두 글을 참고하셔도 좋겠습니다 :
*별점평 반대글 :
https://aexresearch.com/%ec%98%81%ed%99%94-%eb%b3%84%ec%a0%90%ed%8f%89-%eb%b0%98%eb%8c%80%eb%a1%a0/
*영화 밀양의 이동진씨 해석에 대한 비판 부분:
https://aexresearch.com/%ec%98%81%ed%99%94-%eb%a6%ac%eb%b7%b0-%ec%9d%b4%ec%b0%bd%eb%8f%99-%ea%b0%90%eb%8f%85-%eb%b0%80%ec%96%91-2007/
안녕하세요. 예전에 읽었던 글인데 이번에 ‘니체의 글’과 함께 다시 언급하셔서, 오랜만에 다시 읽고 나름의 반박을 해보려고 합니다.
인스타 b****soob**입니다. ㅎㅎ (그냥 인사…ㅎㅎ)
먼저 이동진은 정리하신 바와 같이 지적 허영심에서 a~d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은밀한 재정의의 오류”를 저질렀음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b와 c의 전제를 완전히 틀린 내용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지적 허영심이란 개념은 Jyn님(편의상 이렇게…)의 주장도 포괄하는 동시에 b와 c의 내용도 포괄합니다.
Jyn님은 허영심에서 유심히 살펴야 할 핵심은 “보이고”인데, 이동진은 “있어”에 주목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허영심의 핵심은 타인을 의식하는 것이라는 Jyn님의 주장에 틀린 점은 없어 보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허영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느끼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그를 증명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식을 갖고 싶다”라는 내용이 허영심에서 완전히 배제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허영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더라도, (상황에 따라) 허영이라는 개념이 그 내용까지 품고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 허영심이 더 많고 더 깊은 지식을 향한 동기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있어 보이고 싶은” 욕망이 “진짜 있음”을 추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있어 보이고 싶은”에서 “보이고”가 아니라 “있어”에 주목해 보려는 시도는 유의미합니다. 틀린 시도가 아닙니다.
따라서 “지적 허영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는 노력이 아니라(없고) 타인에게 잘보이기 위해 단편적인 지식을 피상적으로 암기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는 Jyn님의 주장은 틀립니다. 타인을 의식해 단편적 지식을 피상적으로 암기하는 노력이 지적 허영심의 흔한 증상, 사례, 문제점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지적 허영자의 전부를 대표하진 못합니다. 혹은 지적 허영자의 어느 한 시점(현재적이든 아니든)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단편적인 지식을 피상적으로 암기하는 것에서 멈추는 지적 허영자가 있을 수 있고, 그 암기에서 더 깊은 지식을 탐구하는 것으로 발전하는 지적 허영자가 있을 수 있고, 동기는 분명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으나 처음부터 단편적 지식을 피상적으로 암기함을 지양하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진짜 지식(여기서 ‘진짜 지식’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단편적인 지식의 반대로 생각해 주세요)을 탐구하는 것부터 노력하는 지적 허영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적 허영자는 피상적 지식만을 습득한다는 논리를 반박했지만, Jyn님이 말씀하신 피상적 지식이 개인에게 해로운 이유 3가지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겠습니다.
첫째, 말씀드렸듯 피상적 지식을 바탕으로 언젠가 더욱 본질적인 지식을 탐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교양이 있는 사람”에게 “쉽게 간파당하”는 경우도 좋은 예시입니다. 누군가에게 쉽게 간파당하여 그 분함과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본질적인 지식 탐구를 위해 노력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둘째, 역시 비슷한 내용입니다. 책 한 권 읽은 자가 제일 무섭지만, 그 사람이 언제까지고 책 하 권에서 멈춰있을 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크루거 효과 또한 초반부(우매함의 봉우리)를 넘어선다면 언젠가 성장을 이룩할 수 있죠.
셋째, 허영심은 정신질환이고 행복한 삶을 도저히 영위할 수 없다는 점은 논점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확대해석으로 보입니다.
“지적 허영자가 해야할 노력은 피상적 지식의 조각따위나 외우며 자위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욕심을 솔직하게 직시하고 그것을 떨구어 낼수 있는 진짜 지식을 쌓는 일이다.” << 맞습니다. 저는 지금 후자도 지적 허영자의 범위에 충분히 속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대중적으로 이동진씨가 영화평론가로서 인지도가 높은데, (중략) 그의 발언들을 유심히 들어보면 몇가지 개념들을 비약적으로 연결시키고 특유의 시적인 표현으로 비약의 과정중에 발생하는 논리적 오류들을 멋지게 포장하여 가리는 수사학적 화법을 자주 사용한다.” <<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는 메신저 공격에 해당합니다.
저는 이러한 이유들로 지적 허영심 긍정론은 유의미하고, 완전히 틀린 내용이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네, 의견 감사합니다. 편의상 수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ㅎㅎ 아래와 같이 답변드립니다.
1. 수님의 주장은 한마디로 말해서 “허영심으로 독서를 하다보면 그것이 동기가 되어 더 깊고 많은 지식으로 향하는 발판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제 원문의 주장은 “그런 독서는 단편적이고 얇은 지식을 배회하다가 끝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구요. 사실 제 원 글이나 수님의 댓글이나 둘다 뚜렷한 근거는 없습니다. 수님도 그러하겠지만 저도 주로 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것입니다.
원문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결국 여기서 핵심은 “앎이 대체 무엇인가?”입니다. 먼저 여기서 저와, 수님을 비롯한 이동진 찬성자 분들의 입장이 갈리는 것입니다. 사실 앎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초보자를 위한 수영법”이란 책을 읽고 달달 외웠지만 평생 단 한번도 수영장에 가본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수영장에서 매일 살다시피 10년간 수영만 해오던 또다른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둘다 수영에 대해 알기는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제 입장에서, 그리고 제 원문의 취지에서 전자의 책만읽은 사람은 수영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 해당됩니다. 제가 주로 인정하는 앎은 “소크라테스의 앎”을 말합니다. 즉, 행동으로 연결될수 있어야 진짜 아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앎에 저는 큰 의미를 두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동진식 앎과 진짜 앎 사이의 간극은 거의 다른차원이다시피하여 건너갈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어쩔수 없이 건방진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는데, 저는 위 앎의 스펙트럼을 모두 경험해보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앎이 무엇인가”와 “내가 아는 앎을 타인에게 어떻게 전달하느냐”를 주된 관심사로 두고 굉장히 오랜시간동안 치열하게 고심한 사람입니다. 영화에 대해 관심을 가진 한가지 이유도 앎의 전달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지 않나 싶어서 입니다. 사실 원문에 제가 주장한 내용을 저는 산위에서 내려다 보듯이 훤희 보여서 하는 말이었고 솔직히 이동진씨의 주장은 보고 약간은 웃길 정도입니다. 이렇게까지하면서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싶은거죠. 저는 저럴바에는 그냥 밖에 나가 친구들과 뛰어노는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봅니다. 모두가 꼭 책을 읽으면서 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끝나버리면 “내가 해봐서 아는데?” 밖에 되지 않아 문제가 되는데, 다행히도 제가 니체글에 써둔바대로 한가지 글이 더 남아있습니다. 바로 위에 주장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했는데 약소하지만 나름 과학적이고 통계적인 근거를 한가지 추가할 예정입니다. 그 글은 시간이 필요해서 나중에 작성될 예정입니다:)
2. 제가 “허영심은 정신질환이고 행복한 삶을 도저히 영위할 수 없다”고 언급한 부분에 대해 확대해석이라 말씀하셨는데, 이부분은 제가 오해를 하게 썼군요. 여기서 제가 말한 정신질환은 의학적인 의미가 아니고 철학적 혹은 수사학적인 의미에서 쓴것입니다. 즉, 허영심이 있다고 병원 갈 필요는 없지만 행복한 삶에 지장을 주는 문제임은 맞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동진 찬성론자들은 허영심에 대해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것 같습니다. 여기서 핵심이자 포인트는 “허영심은 누구나 있지만 이동진씨처럼 허영심에 대해 권장에 가까운 미화를 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동진씨의 주장은 큰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위험한 발언입니다. 저는 이동진씨가 그동안 대체 뭘 읽은건지 이해가 잘 안가는데 왜냐하면 수많은 철학자, 문학가들은 허영심을 극복하려고 치열한 노력을 해왔고 책의 주된 주제로도 종종 삼기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굳이 책을 꼭 읽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저는 허영심이란 위험한 수단을 동원해가며 독서를 할필요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3. 제가 원글의 말미에 이동진씨가 특유의 시적인 표현으로 비약의 과정중에 발생하는 논리적 오류들을 멋지게 포장하여 가리는 수사학적 화법을 자주 사용한다 등등 을 말하면서 비판한것은 이동진 독서법과는 무관하게 평론가로서의 “이동진”을 살짝 비판하면서 마무리한 부분입니다. 즉 본문의 주장을 위한 근거로 든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메신저 공격이라고 보기는 힘들겠네요.
4. 요약하자면, 이동진 찬성론과 반대론의 간극은 “앎이 무엇인가(지식론)”와 “허영심의 위험성”에 대한 시각차에서 비롯됩니다. 물론 저는 이동진씨가 앎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으며, 허영심의 위험성을 심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담으로 이 주제에 대해서도 나중에 제 영화책에 넣을지도 모르겠는데, 만약 넣게 된다면 조금더 자세한 내용을 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