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예술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제가 운영하는 아래 유튜브에 방문해보시기 바랍니다.
유튜브 채널 : @dayzart_official
아래 글은 철학자 질 들뢰즈가 1982년 퍼듀대학교에서 이루어진 세미나에서 에릭 로메르 감독에 관해 언급한 부분만 발췌한 것입니다. 영어 원문을 기계번역후 제가 다시 매끄럽게 다듬은 것이며, 해당 강의의 영어 원문 전체는 아래 퍼듀대학교 홈페이지 링크에서 제공되고 있습니다.
https://deleuze.cla.purdue.edu/seminars/cinema-movement-image/lecture-06/
이 밖에도 질 들뢰즈의 강의 전체와 관련된 영어와 프랑스어 문서 및 오디오 자료가 퍼듀대학교 공식 홈페이지에 잘 정리되어있으니 필요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https://deleuze.cla.purdue.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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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알겠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매우 난해하기 때문에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제가 여러분께 알려드리고 싶은 짧은 텍스트를 발견했는데, 그 텍스트가 저를 약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1977년 에릭 로메르의 글이 실린 카이에 르노-바루(Cahiers Renaud-Barrault )의 오래된 호를 주었습니다(역주 – 이 글은 영어로 번역되어 다음 책으로 출판되었다 : Eric Rohmer: The Taste for Beau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에릭 로메르 감독은 매우 중요하고 그의 영화도 매우 중요하지만, 저에게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것은 로메르의 텍스트가 “영화와 담론의 세 가지 평면: 직접/간접/초직접(hyper-direct)”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초직접”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은 자유 간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로메르가 1977년 이전에 쓰여진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의 텍스트를 조금도 언급하지 않고 자신의 범주를 설정한 것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로메르는 책을 많이 읽었고 훌륭한 영화 감독일 뿐 아니라 뛰어난 영화 평론가이기도 한데, 그런 사실을 몰랐기 때문일까요? 기이하죠. 그는 그들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가 파솔리니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 문제에 대해 다른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는 새로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점에서 그가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로메르의 텍스트는 그 자체로 매우 비범하지만 파솔리니와 관련해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그는 < O 후작부인>을 생각하고 있었거나 이미 촬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문학에서, 클라이스트(Kleist)의 텍스트에서, 클라이스트의 이야기에서 매우 독특한 유형의 간접 담론이라는 문학적 형식이 눈에 띄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특별한 형태의 간접 담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는 <O 후작부인>과 관련하여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전달할까요? 그는 그렇게 할 수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화를 통해서라고 제안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솔직히 말해서 그는 대화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텍스트 전체를 보면 그가 대화를 넘어서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가 말하는 것은 움직임-이미지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O 후작부인>과 <도덕 이야기>에서 로메르가 파솔리니의 스키마에 어떻게든 네 번째 차원을 추가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로메르의 스키마는 —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하지 않습니다 — 더 이상 영화의 미적 의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영화의 지각 의식도 아닙니다. 영화의 기술적 의식도 아닙니다. 사실 영화의 도덕적 의식입니다. 윤리 의식이죠. 그의 이야기들이 바로 <O 후작 부인>에 더해진 도덕적 이야기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달성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도 두 가지 수준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문제가 있는데, 첫째는 인물들이 그림으로 취급되는 프레임 안에 들어오고 나올 때 하는 행동과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림을 설정하는 방식에서 카메라를 의식하는 것, 그리고 그림의 연속과 이 둘 사이의 오염, 즉 지각에 영향을 미치는 기괴한 상황에 처한 후작 부인이 바라보는 세상과 카메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세상 사이의 오염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두 수준 사이의 오염이 있습니다. 카메라와 영화가 스스로를 의식하게 되는 것은 후작 부인이 바라보는 세상을 통해서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카메라가 고정하는 방식인 프레임을 통해 후작 부인이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영화에는 일종의 두 가지 작업이 필요하며 이것이 바로 영화가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파솔리니가 시의 영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