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이를 위한 한줄 소개 :
삶의 고통을 다루는 방식에 관한 사이코 드라마
1.감상평
이 영화는 비교적 단순하고 분명한 이야기 구조를 가진 탓에 역설적으로 오독하기 쉬운 작품이다. 쉬워보이는 영화의 겉모습을, 특히 주연인 전도연의 연기에만 몰입하여 따라가다보면 그녀에게 설득당해 “지지리도 운이 없는 한 여성의 기구한 운명”을 그린 단순한 작품으로 이해하고 그녀에게 동정어린 마음만을 품은채 영화관을 나오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충분한 여지가 있었음에도 전도연이 겪게 되는 여러 불행들 자체의 묘사는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다. 오히려 영화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전도연이 불행에 대하여 취하는 대응 방식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품의 서사는 크게 두개의 축을 갖는데, 하나는 전도연의 내적 심리이고, 나머지 하나는 전도연과 송강호의 관계이다. 일단 두 주인공의 사랑을 부각하는 포스터의 문구등을 볼때 영화의 마케팅상 강조된 것은 후자이지만 이것이 영화상에서 성공적으로 표현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송강호의 캐릭터는 삶의 고통을 겪는 여인을 든든하게 버티고 지켜준다는 “이상적인 키다리아저씨식” 캐릭터인데, 그것의 식상함과 비현실성을 떠나서 사실 이같은 사랑은 건강한 사랑의 형태라고 보기도 힘들다. 결국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전도연의 내적 심리”가 되는데, 영화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이것에 집중하고 있다.
전도연은 극중에서 여러 기구한 고난들을 겪게 되는데, 그것에 대응하는 그녀의 방식은 지극히 현실 도피적이요, 자기기만에 바탕을 둔 것들이다. 생전 남편이 바람을 핀 사실을 그녀는 부정하고 오히려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살게 되는데 이것은 남편에 대한 의심의 반동으로 인한 행위이다. 그녀는 실제로는 돈이 없으면서도 땅을 산다고 마을사람들에게 말하기도 하고, 자신을 쫒아다니는 송강호를 낮추어 보면서도 그에게 의지하는 이중적인 모습도 보인다(참고로 이 부분은 사르트르가 그의 저서 “존재와 무”에서 예시했던 자기기만의 형태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그녀의 도피적 행위는 아들이 죽고 교회에 나가는 것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그녀는 사실 신에 대한 믿음 없이 단순히 자신의 처지에 대한 위로 차원에서 종교를 갖은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하면서 논란이 되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바로 전도연이 교도소에 있는 유괴범을 면회가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보고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가 “반기독교적인 영화”라고 잘못 이해하는 듯하다. 이 부분에 대한 좀더 자세한 분석을 해보자.
분석에 앞서 먼저 우리는 극중, 전도연이 만들어놓은 감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즉, 그녀에 대한 감정이입에서 빠져나와 전도연과 유괴범의 상황을 “영화가 준 정보”만을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유괴범의 말을 요약하면 “감옥에 들어와 자신이 행한 일 때문에 후회와 고통속에서 살았는데 기독교를 믿고 하나님에게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이다. 우리가(전도연도 포함하여) 그의 말에 부조리함을 느끼는 이유는 순전히 “증오심”때문이다. 즉, “나쁜자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증오적인 명제를 영화속 상황이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교리는 원래 이러한 명제에 반하여 “죄인도 사랑하라”는 명제를 주장한다. 유괴범은 이 “반-명제”에 충실했을뿐이다. 물론 이 교리에 대한 비판은 영화외적으로 얼마든지 있을수 있으나 이는 영화가 다루는 논점을 벗어나는 것이며 실제로 영화는 이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단지 이 상황에서 벌어지는 전도연의 심리가 갖는 이중성만이다.
전도연이 유괴범을 면회간 이유는 “죄인도 사랑하라”는 신의 뜻에 따르기 위함이 아니며, 그를 용서하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녀는 “자신을 위로” 하기 위하여 면회를 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신의 권능의 대행자”라는 압도적 우위에 서서 그로부터 사과를 받고, 이제 “신에 뜻에 따라 아무일도 없는 것”이 된다는 일종의 주술적 선언을 얻기 위해 유괴범을 방문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유괴범 스스로가 신으로 부터 직접 용서를 받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녀는 그녀가 가져야할 “우위성”이 깨지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결국 절망하게 된다. 이처럼 전도연이 갔던 면회의 과정 역시 “자기기만과 도피”로 얼룩져 있다. (노파심에서 덧붙이는데, 지금 이 글은 영화에 대한 분석이지 윤리학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나는 유괴범의 셀프 회계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밝혀 둔다. 그것은 영화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전반적으로 이 영화에서 기독교는 무미건조하게 다루어지는 하나의 소재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영화는 기독교를 “중립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를 전도연이 행한 일련의 도피행위의 대상인 “도피처”로 보아 비판할 여지도 충분히 있었지만 영화는 거기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명시적으로 그같은 나아감을 중단하고 있다. 그리고 이 중단됨은 오히려 전도연의 도피적 자세를 더욱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영화속에서 묘사되는 종교인들은 사실 어떠한 위선도 없다(우리 현실세계속에서는 어떻든간에 아무튼 영화속에서는 없다는 말이다). 전도연의 음모에 연루되어 애정행각을 벌이던 집사는 결정적 순간에 자신의 신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교회 신자들과 목사는 그녀에게 끝까지 친절하며 정중하다. 심지어 송강호 역시 그녀의 자살 시도 이후에도 계속해서 교회에 나간다.
이제 영화의 형식적 측면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자. 논리적 근거는 없는 감정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개봉시점과 상관없이 항상 90년대의 풍모를 진하게 풍기는 것 같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올드하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만의 독특한 감성이 있다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말이다. 사실 이 작품은 서사적으로 벌어지는 사건간의 개연성이 부족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영화 전체가 전도연의 심리묘사에 집중하고 있는 탓일 것이다. 그만큼 전도연이 극 전체를 끌고 간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것인데, 그녀는 이 작품에서 대단히 스펙트럼이 넓은 역을 무난히 소화하고 있다.
아울러 각본 창작 측면에서 이 영화는 실제 벌어졌던 유명한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이용하고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이 모티브로 활용한 것이다). 이처럼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도 영화적 소재로 충분히 활용될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 창작자들이 세속적인 사건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되겠다. 여담으로 이 살인 사건은 일명 “주교사 살인 사건”이라 불리는, 법학계에서 아주 유명한 사례중 하나이다. “공범을 어떤식으로 처벌해야 할 것인가”가 논점이 되었던 사건인데, 영화속에서는 이 공범 역할을 실제 사건과는 달리 딸이 맡게 되었고(실제 사건에서는 여고생 제자였다), 특별히 부각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끝으로 영화의 결말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병원을 퇴원한 전도연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에서는 그녀의 운명과 관련된 몇가지 중요한 단서들을 병렬적으로 제시하는데, 그녀가 미용실에서 싸우는 장면, 미용실에서 나와 하늘을 쳐다보며 신에게 한탄하는 장면, 그녀의 조언대로 인테리어를 바꾼 가게에서 벌어지는 장면, 그리고 집으로 쫒아와 거울을 들어주는 송강호가 그것이다. 앞의 두가지 장면은 그녀의 병적인 심리상태가 여전함을, 나머지 두 장면은 개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아마도 “어려움이 있겠지만 사랑의 힘으로 결국에 그녀가 불행을 극복할 것”임을 암시하려는 것 같다. 어쩌면 해피엔딩에 초를 치는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사실 영화를 떠나 지극히 현실적으로는 이런 사례들은 대게 불행한 결과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인간의 삶을 변화 시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극중 전도연의 삶이 개선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현실에 직면하는 것”이다. 즉 현실의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것을 어설픈 희망따위로 조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감독의 바람대로 사랑의 힘에 기대어 극복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함이 있고,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식으로 또다른 당사자인 송강호의 삶이 행복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2.이동진씨의 잘못된 해석에 대한 비평
이동진씨가 영화속 한장면에 대한 분석을 한것을 우연히 발견하였는데, 몇가지 문제를 가진 잘못된 분석으로 보인다. 이 분석속에 우리나라 영화평론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전형적인 문제점들도 있는 것 같다. 유익한 사례가 될 것 같아 간단하게 살펴보겠다. 아래는 이동진씨의 발언 본문과 해당 장면의 스냅샷이다. 앞의 숫자와 볼드체 처리는 내가 설명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붙인 것이다.
1.(장면 설명 후) 이 쇼트가 너무 이상한 쇼트에요. 왜냐하면 그 쇼트는 카메라를 유리문 뒤쪽으로 옮겨서 안에서 유리문을 걸고 신애의 망연자실한 얼굴을 잡았는데, 그렇게 찍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장면은 시점 쇼트가 아니거든요.
2.다시 말해서 종찬이 노래를 부르다 신애를 봤을 때는 말이 되는 장면이지만, 그게 아니고 종찬은 신애가 온줄 모르고 노래를 부르고 있기 때문에 유리 문 안에서 쳐다볼 누군가라는 존재가 없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왜 굳이 유리문 안쪽으로 집어 넣어서 카센터 밖에 망연자실한 그녀를 찍었을까라는 의문이 있는 건데,
3.그것은 이 영화가 간접성 자체, 다시 말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도와 주려는 호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존재하는 투명한 장벽을 보여주고 있는 방식이라는 거에요.
4.(중략)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다 설명이 되거든요. ‘아, 이 전쟁은 혼자서 치뤄야 하는 전쟁이구나.’ 신애가 깨닫게 되는 것을, 카메라 위치로 보여주는 것이거든요.
출처: [이동진, 김중혁의 영화당 #76] 이창동 감독이 도달한 깊이 (시, 밀양)
먼저 이동진씨의 해석을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주 간단히 요약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1)위 씬은 “시점쇼트”와 관련된 “비정상성”이 있으므로 “해석의 대상”이 된다. 2)해당 쇼트에서 보여지는 유리창은 명백히 “의도적”인 것으로 “투명장벽”이라는 상징물이다. 이 투명장벽은 송강호와 전도연이란 두 인간 사이를 가로 막는 “외부적 장애물”이다 (이 주장에는 두 사람이 결합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 3)전도연이 발길을 돌리는 이유는 이 외부적 장애물에 의해 도움을 받을 기회가 좌절되었고 여기서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독립적인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세 명제가 이동진씨 해석의 요약이라고 볼수 있다. 물론 세 명제 모두는 사실이라고 보기 힘든 것이다.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이동진씨 평론의 본문 1과 2에서 이동진씨는 해당 장면은 관찰자가 필요한 “시점쇼트”인데, “전도연을 직접 쳐다볼 관찰자가 없으므로” 해당 장면이 비정상적이며 특별한 해석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시점쇼트”라는 용어가 가진 함의는 “실제(actual) 관찰자”의 존부에 따라 시점쇼트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 아니라, “가상(virtual)의 1인칭 관찰자”가 바라보는 이미지를 스크린상에 구현한다는 것에 있다. 따라서 실제 관찰자의 시점과 이미지의 시점이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다거나(아래 유튜브 클립의 #2를 참고하라), 심지어 실제 관찰자가 아얘 존재하지 않더라도 시점쇼트는 가능한 것이며, 이점에서 위 씬이 특별하게 해석의 대상이 되는 “비정상적인 쇼트”라고 볼 이유는 없는 것이다. 분석에 있어서 이같은 유형의 오류를 저지르는 심리적인 이유에는 흔히 두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먼저 영화를 분석하고 그에 따른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결론을 정해놓고 그에 짜맞추어 설명을 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확증편향이라고 볼수도 있겠다. 둘째는 어떤 개념이나 용어를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암기하여 기계적으로 적용하기 때문이다. 이들 심리적 오류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연구자들이 빈번하게 하는 실수이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애당초 본 장면에서의 유리창은 해석의 필요성 자체가 없는것이다. 하지만 계속 이동진씨의 평론의 나머지 부분도 분석해보도록 하자. 본문 3에서 이동진씨는 “투명한” 유리를 두 사람사이의 “투명한” 장벽의 은유(혹은 상징)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이 투명 장벽은 “두사람의 결합 욕구를 방해하는 외부적 장애물”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투명장벽의 저항을 받은 전도연은 다시 발길을 돌리게 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독립적인 결심을 하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 장면 이전부터 애초에 친하지 않은 사이였고, 심지어 이는 전도연이 명시적으로 송강호를 거부한 탓이다. 영화의 전반부 내내 전도연이 송강호를 거부하는 장면이 보여지는데, 1)전도연은 카센터로 들어와 커피를 마시라는 송강호의 요구를 거부하고, 2)피아노학원에 도움을 주러온 송강호에게 명시적으로 거부의사를 표하며, 3)식사자리에서 명시적으로 송강호에게 “속물”이라고 말하며, 4)전도연의 동생은 송강호에게 “당신은 누나 스타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5)아울러 “고상한” 클래식 피아니스트라는 전도연의 직업은 간접적으로 송강호에 대한 전도연의 비호감을 암시해주기도 한다.
위와 같이 해당 쇼트에 선행하여 밝혀진 여러 영화적 설정들은 한마디로 전도연과 송강호 사이의 관계를 “전도연의 명백한 거부”라는 관계로 쉽게 이해할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 어떻게 이동진씨 말처럼 이 장면이 “두 사람사이에 서로 도와줄 호의가 있음에도 결합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투명장벽에 의해 좌절되는 전도연”을 그리는 독특한 쇼트가 될수 있겠는가? 그의 해석은 영화의 전반적 흐름에 역행하는 황당한 해석이다.
본문 4에서 이동진씨는 전도연이 “이 고난을 스스로 해결해야 된다”는 마음을 품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혼자 해결하려는 판단을 그녀가 한 것은 사실이다. 그랬으니 카센터에서 발길을 돌린 것일테니 말이다. 여기서 이 명제 자체만을 단독으로 분석하면 안되고, 이동진씨의 본문 3의 주장과의 관계에서 이 명제를 분석해야 한다. 쉽게 말해 논점은 “왜 그녀는 혼자 문제를 해결하려 결심했는가?”이지 이렇게 결심했다는 것은 행동으로 보여지는 당연한 사실이므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결심한 이유는 나는 위에서 밝혔듯이 “전도연의 송강호에 대한 거부감의 자연스러운 발로”라고 보는 것이며, 이동진씨는 이 결심을 유독 강조하면서 “두 사람사이의 외부적 장애물”이 이 결심의 이유라고 보는 것이다. 이미 이에 대한 이동진씨의 오류는 밝혔었고, 한가지 비판을 더 추가 한다면 아래와 같다.
앞서 감상평에서 살펴보았듯이 전도연은 매우 도피적이며 자기기만적인 인물이다. 이동진씨 주장처럼 이해하게 된다면 작품 전체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캐릭터가 갖는 일관성을 심각하게 깨뜨리게 된다. 그녀는 위 장면 이전에는 송강호로 부터 이미 여러 차례 도움을 받았었고, 장면 이후에는 잠시 홀로 유괴범과 상대를 하긴 하지만, 결국 송강호를 불러 그에게 “의존”하고, 교회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이동진씨의 해석은 장면의 선후간에 벌어지는 그녀의 행보와 전혀 맞지 않는 해석이다. 이같은 잘못된 해석은 이동진씨가 이 영화를 단순히 “전도연의 고난사” 정도로 이해하는 것에 그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화를 보게 된다면, 전도연이라는 캐릭터에 과도한 “동정심과 연민”을 가지게 되고, 이러한 과몰입이 판단력을 흐트려 놓아 영화의 모든 장면, 이를테면 유리창과 같은 각종 소품들, 등장인물의 자연스러운 행동들까지도, “아주 특별한” 연민의 의미를 부여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제 해당 씬을 제대로 다시 분석해보자(사실 앞서 밝혔듯이 분석의 필요성 조차 없는 일반적인 씬이지만). 먼저 전도연은 유괴범의 전화를 받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일단 송강호에게 찾아간다. 그가 밀양에서 유일하게 도움을 청할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단 찾아는 갔지만 애당초 그녀는 송강호에게 거부감이 있고 이미 앞서 여러차례 “거부의 의사”를 명백히 표시한적이 있다. 이 거부감에 의해 유리문앞에서 자연스럽게 다시 발길을 돌리고 만다. 이는 평소에 품고 있던 심리에 의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카센터에서 빠져나온 전도연은 다시 아이를 잃은 슬픔에 오열하고 길에서 주저 앉는다. 다시 말해 이 지점에서 송강호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미 사라졌으며 두사람의 심리적 연관관계는 끊긴 채 유괴된 아이와의 새로운 연관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이 장면은 전도연의 위선과 이중성을 보여주기도 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아들이 유괴된 상황속에서도 자신이 송강호에 가졌던 평소의 입장에 따라 그의 도움을 거부하고 있다.
나의 해석에 따르면 위 장면이 영화 전체의 흐름을 깨뜨리지 않으며 유기적으로 결합된다. 그리고 이 해석에는 “두 사람과의 투명 장벽”같은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요상한 개념을 도입할 필요도 없다. 이 해석은 일반인의 합리적 사고로 지극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며 어떠한 비약도 없다. 요컨대, “오컴의 면도날”로 대변되는 철학적 간결함의 원칙에 충실한 해석인 것이다. 나는 이창동 감독이 해당 장면을 찍으면서 유리문을 바라보며 “올커니! 이것이 바로 전도연과 송강호사이의 투명 장벽이야”라는 마음을 품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유리문은 그냥 유리문일뿐이다. 해당 씬을 쇼트별로 자세히 분석해보면, 유리문이 삽입되는 것이 감독의 “특별한” 의도라기 보다는 전도연이 문앞으로 점진적으로 접근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삽입된 것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다시 말해 억지로 유리문을 빼버린다면 전도연이 유리문 바로 직전까지왔다는 정보전달이 관객에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어색하다. 이동진씨의 주장과는 반대로, 이 상황에서는 유리문을 빼버리는 것이 인지적으로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쇼트간의 연결을 만드므로 오히려 “비정상 쇼트”가 되버린다. 요컨데 유리문은 의도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삽입될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영화 평론가들은 영화 해석에 불필요하고 요상한 형이상학적인 물을 들이는 습관을 좀 뺄 필요가 있다. 그것들이 비록 남보기에는 멋지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이해에는 도움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사례와 같은 상징과 은유에 있어서의 “꿈보다 해몽”식의 비약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일전에 이와 관련한 아주 쉬운 설명을 쓴바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참고 링크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