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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평론가의 임무
이번 편부터는 여러분(관객)의 영화 감상을 도와주는 영화 평론가(비평가)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결국, 여러분이 즐거운 영화 관람을 위해 영화 평론가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는데요, 이를 위해 먼저 “바람직한 영화 평론가”는 어떤 모습일지 부터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서로 다른 많은 주장이 있을수 있겠으나 저는 다음 세가지를 영화 평론가의 주된 “임무”로 봅니다.
1.영화 평론가는 연구자로서 예술가가 활용할수 있는 연구 결과물을 생산해야 합니다.
2.영화 평론가는 “다양한” 스타일의 영화를 “균형있게” 관객들이 볼수 있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3.영화 평론가는 자칫 사장될 뻔한, 알려지지 않은 흙속의 진주같은 영화를 발굴하여 관객에게 소개해야 합니다.
이 세가지를 요약하면 결국, 영화 평론가는 영화 창작자(감독, 각본가, 기타 등등)라는 예술가, 즉 “전문가 집단”을 서포트하는 “또다른 전문가 집단”이 됩니다. 다시 말해 영화 평론가는 원칙적으로 대중(관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문가(예술가)를 위한 또다른 전문가인거죠.
언뜻, 두번째와 세번째 주장은 관객에게 영화를 소개하므로 관객을 위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둘다 관객이 다양하고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보게끔 만들어 이런 소수의 영화를 창작하는 예술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관객이 아니라 예술가를 위한 영화 평론가의 임무인거죠.😆
위 제 주장을 보고 “지나친 엘리트 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우리 관객들을 무시 하는게 아닌가?” 라고 부정적으로 보실지도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위와 같은 제 주장에 따를때에만 결과적으로 일반 대중 관객에게도 이익이 됩니다. 예술계가 더 왕성하게 발전하고 다채로운 작품들을 볼수 있는 기회를 관객들이 제공받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영화 평론가는 대중의 구미에 맞추는 엔터테이너가 아니고, 예술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진지한 연구를 하는 지적 전문가입니다.
영화 평론가는 예술가가 아니다
영화 평론가가 전문가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들이 쓰는 글은 전문가 집단만의 어떤 독특한 “관습적 형식”을 가지게 됩니다. 예를들어 변호사가 작성하는 법률 문서는 그들만의 독특한 형식이 있습니다. 그 형식속에는 어느정도 비효율적인 면이 있으나(일반인들은 알아보기 힘들다던지, 국문법에 안맞는다던지 하는) 어찌되었든 관습처럼 그대로 굳어져 그들끼리의 의사소통에 사용됩니다. 과학자의 논문도 그렇고 의사의 의료기록등도 비슷한 예가 되겠습니다
제가 볼때에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영화 평론가가 생산하는 글의 특징은 한마디로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영화 평론이 문학 평론의 전통에 많이 영향을 받았다는 점, 영화 평론가 중에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많다는 점, 그리고 평론의 대상이 영화라는 예술이라는 점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저는 이 같은 관습을 부정적으로 보며, 영화 평론가는 예술가가 아니므로 그들이 생산하는 글은 철저하게 “논리와 이성에 바탕을 둔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설명문”에 가까워야 한다고 봅니다. 즉, 평론글에 자신의 따뜻한 감수성이 듬뿍담긴 애매모호하게 아름다운 시적인 문장들을 나열하면 안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영화 평론가의 글은 영화를 최대한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그것의 가치를 해명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같은 저의 주장에 대하여 “예술을 어떻게 논리로 풀수 있는가? 그렇게 해서는 예술을 알수 없다!😡”는 반박이 있을수 있습니다. 당연히 예술을 논리로 전부 풀 수 없습니다. 저런식으로는 예술의 절반만 알수 있을뿐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절반은 어찌해야 할까요? 쉽습니다. 그냥 절반은 관객에게 맞기면 됩니다.😋 영화 평론가가 북치고 장구치고 혼자 다할 필요가 없으며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거죠.
평론가가 영화의 이 지점에서 A의 감정을 느꼈음을 우아한 문체로 써주고 저 지점에서는 B의 감정을 느꼈음을 역시 아름다운 시처럼 써준다고 관객들이 그 글을 보고 각각의 지점에서 A, B의 감정을 평론가와 똑같이 느낄리 만무합니다. 영화 평론가가 관객의 감정까지 대리로 느껴줄수는 없는거죠. 이렇게 지나치게 감수성만으로 가득찬 흐리멍텅한 글은 언뜻 아름다워 보일지는 모르나 영화 평론가의 글로서는 딱히 쓸모가 없게 됩니다.
영화 평론가의 첫번째 무기 — 한줄평
이제 영화 평론가라는 직업의 속성에 대해 대강 알아보았으니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이들의 작업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고 여러분이 이들의 작업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에는 모두 세가지가 있습니다. 한줄평, 별점평, 그리고 긴 평론(비평)글이 그것입니다. 시간 관계상 제 연재글에서는 한줄평과 별점평에 대해서만 살펴보려하는데, 이번편에서는 먼저 한줄평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저는 이 한줄평 시스템이 좀 괴상해 보이는데, 왜 하필 한줄인가? 서너줄, 혹은 대여섯줄이면 안되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대중들이 긴 글을 읽기 싫어하니 한줄로 간단히 요약해주려는 영화 평론가들의 배려일까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한줄은 편한데 서너줄은 너무도 귀찮아서 도저히 읽기 싫다는 것인데 그런 분들이 정말로 세상에 존재하긴 하는건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첫 눈이 내릴때
수선화의 꽃잎은
오그라들기도 합니다.-바쇼
이 시는 일본의 시인 바쇼가 지은 시로서 “하이쿠”라는 일본 전통 문학의 한 장르를 따르는 작품입니다. 줄을 나누어 놔서 그렇지 사실상 딱 한문장으로 이루어진 시죠. 이 하이쿠라는 장르는 쉽게 말해 “여백의 미”같은 것을 아주 신비롭고 오묘하게 표현하는 독특한 예술 형식인데, 제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우수한 예술 형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 시를 잘 음미해보면 단순히 눈올때 수선화의 모습을 기록한게 아니고 그 뒤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어렴풋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 “아리까리하고 애매모호하면서 요상한 그 무엇”을 표현할수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보아야할 예술 형식인거죠.👍
저는 한국의 영화 평론가들이 쓰는 한줄평들을 볼때 마다 이 하이쿠 생각이 납니다. 물론 하이쿠가 우수한 예술임에 틀림은 없지만, 제가 위에서 밝혔듯이 영화 평론가는 기본적으로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논리적인 글을 써야 합니다. 하이쿠는 이런 목적으로는 부적합한거죠. 최소한 서너줄의 설명문 형태는 되어야 이런 논리적 표현이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왜 한국의 평론가들은 구태여 쓰기도 어려운 한줄평을 고집하는 것인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일입니다. 그들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예술혼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그냥 시인으로 데뷔하는게 쉬울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한줄평과 관련한 또한가지의 쟁점은 만약 한줄평을 굳이 쓸거라면 기본적으로 “영화를 아직 관람하지 않은 예비 관객”에게 가이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한줄평만 보고서도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관람을 할지 말지 관객이 판단할수 있게 도와줘야 합니다.
한줄평 사례 살피기
이제 실제로 영화 평론가들이 작성한 한줄평을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년에 개봉되었던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 대한 한줄평을 사례로 삼겠습니다. 먼저 아래는 해외의 단평인데, “로튼 토마토의 평론가 총평”입니다.
만약 ‘헤어질 결심’이 박찬욱 감독의 걸작들과 같은 수준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로맨틱 스릴러는 다른 기준으로는 여전히 주목할 만한 업적이다.
한국의 한줄평보다는 약간 길이가 깁니다. 그리고 문장이 무미건조한 설명문입니다. 제가 제시한 기준을 만족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박찬욱 감독의 다른 작품보다는 좀 떨어진다고 평을 하고 있네요. 참고로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로맨틱 스릴러”라는 간단한 단어를 사용하여 두 장르가 복합되어 있는 특이한 작품임을 암시합니다. 이 단평은 무난하면서도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구성된 괜찮은 단평입니다.
아래 부터는 한국의 평론가들의 한줄평을 검토하겠습니다. 평론가의 이름은 제가 의도적으로 지웠는데, 명예훼손죄로 붙잡혀 갈까봐 지운 것은 아니고(참고로 저와 같은 상황에서는 명예훼손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하나의 사례만으로 해당 한줄평을 쓴 평론가에 대하여 편견을 갖을까 우려되어 일부러 지운 것입니다. 여기서는 비록 이상한 한줄평을 썼지만 다른 작품에서 탁월한 비평활동을 했을수도 있고, 그 반대일수도 있습니다. 단 하나로 전부를 판단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고 공정치 못한 일인거죠. 참고로 저는 아래 한줄평들을 작성한 평론가들이 어떤 분들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등등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파란색으로도 보이고 녹색으로도 보이는 그 옷처럼, 미결과 영원 사이에서 사무치도록.
이 평론가는 제법 아름다운 시 한편을 쓰셨군요. 비록 멋지긴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이런 글은 평론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집니다. 영화라는 미궁을 시라는 미궁으로 풀면 관객들은 이중의 미궁속에 갖히게 됩니다. 여기서 언급된 옷은 영화가 가진 애매모호함을, 후반부 문장은 미완이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영화속 사랑을 말합니다. 스토리의 핵심을 잘 짚긴 했지만 중요한것은 이 한줄평을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이 읽으면 대체 뭔소리인지 알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보로서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마.침.내. 이 엔딩에 도착하려고 그 오랜 시간 영화에 빠진 것처럼
한마디로 영화의 엔딩이 좋다는 말인데, 어지간한 영화들은 다들 엔딩은 좋습니다. 하나마나한 소리입니다.
카메라의 권능과 변태적 편집의 위력. 숨소리마저 예쁜 극한의 세공
여기서 카메라의 권능은 미장센을, 변태적 편집은 몽타주를 의미합니다. 즉 이 영화가 미장센과 몽타주가 탁월함을 암시해주네요. 영화의 특징을 잘 뽑아내었습니다. “세공”이란 단어 선택이 아주 좋은데, 영화가 마치 정교한 보석처럼 정밀하다는 것을 실감시켜줍니다. 전체적으로 누구나 이해할수 있게 문장이 쉽습니다. 좋은 한줄평입니다.
수사(搜査)로 멜로를 감정하고, 멜로로 감정을 수사(修辭)한다
앞의 수사는 경찰의 수사이고, 뒤의 수사는 꾸민다는 의미에서의 수사입니다. 마치 랩 가사처럼 라임을 맞추었는데 이 라임을 만드는라 고생했을 평론가의 노고가 눈에 선합니다. 멋들어진 라임을 맞추는라 정작 평론은 없는 주객이 전도된 한줄평입니다.
오역과 지연, 미결의 역설로 완성된 사랑
등장인물들간의 오해와 감정의 불일치, 엔딩의 미완등을 언급하여 스토리를 요약한것인데,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이 읽으면 너무 애매하지 않을까 싶네요.
박찬욱 영화의 정서적 만조
정서적으로 풍부하다는 말인데, 관객에게 전해주는 정보량이 너무 부족합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풍부한 건지 좀더 설명을 해주는게 좋았을듯 싶네요.
침투하는 디스플레이와 침잠하는 데이터 너머, 끝내 안개를 껴안는 영화
이 역시 랩가사 같은데 라임을 만드는 실력이 앞서 살펴보았던 또다른 라임을 만드신 평론가보다는 약간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침투와 침잠이라는 라임을 억지로 만들다 보니 정작 내용은 아무런 공감이 가지 않는 것으로 채워졌네요. 핸드폰의 디스플레이가 뭐가 어떻게 침투한다는 것인지 무슨 데이터가 어디로 가라앉는다는 것인지 도대체가 알수 없는 어색한 소리들입니다.
감정이 사건을 이끄는 영화. 그 반대가 아니라
한마디로 감정 표현이 탁월하다는 말인데, 약간 빈약해 보입니다. 좀더 자세한 설명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짙은 사랑이 피어나는 자욱한 정념의 구덩이
어지간한 사랑영화는 다들 사랑이 짙고 정념은 자욱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일반적인 한줄평은 사랑을 소재로 하는 영화라면 어디든지 재활용할수 있는 의미없는 평이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반복해 갈구하며 기억되길 택하다
평론가는 인상 깊은 영화의 엔딩 장면을 강조해준 것인데, 문제는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읽고서 뭔소린지 이해를 할수 없다는 점입니다.
한국영화계의 영원한 모더니스트 박찬욱
당황스러운 한줄평인데, 왜 박찬욱 감독과의 개인적인 술자리에서 할말을 여기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말했듯이 영화 감독을 지나치게 신성시 하는 자세는 좋지 못합니다. 공정해야할 영화 평론가라면 더더욱 그러할겁니다. 더구나 박찬욱 감독이 모더니스트라는 말도 참 뜸금없네요. 왜 모더니스트인지 공감이 안갑니다.
미결되어 영원 재생될 영화. 새롭진 않지만 마침내
역시 영화의 엔딩을 묘사한 한줄평인데,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것입니다. 게다가 뒷부분의 “새롭진 않지만 마침내”는 지나치게 시적이고 애매해서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정확히 알기가 어렵네요.
여기까지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 대한 국내 영화 평론가들의 한줄평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충격적이게도 단 하나의 한줄평 빼고는 평론으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어보입니다. 물론 저와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줄로 압축해서 멋진 시처럼 표현해서 나는 맘에 든다” 뭐 이렇게 말이죠. 그러나 제가 앞에서 밝혔던 영화 평론가의 역할등을 고려한다면, 저는 그런식의 반박은 좀 무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영화 평론가들의 두번째 무기인 “별점평(✨✨✨)”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다음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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