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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연구 2 — 언어의 한계 깨기
저번 편에서는 “상징”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들수 있습니다. 영화 감독들은 뭐하러 구태여 이렇게 복잡한 상징이란 수단을 사용해서 의미를 숨기는 걸까요? 그냥 평범하고 솔직하게 말로 표현하면 알아먹기도 쉬울텐데 말이죠. 예를 들어, 영화 감독이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하자는 메세지를 던지고 싶다면 잘생긴 등장인물이 나와서 “전쟁은 나쁜것입니다! 우리 모두 평화를 사랑합시다!” 이렇게 한마디 해주고 연설을 듣는 청중들이 “옳소!”이러면서 박수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겁니다. 심플하고 쉽고 좋아보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
실제로 위와 같은 스타일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좋은 평은 못받지만 말이죠. 그 이유는 이같이 직설적인 표현 방식은 마치 인터넷 수능강의와도 같아 감동을 유발하기가 어렵고, 결국 메세지를 전달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근본적으로 “언어가 가진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결국 “상징”이란 것도 영화 감독들이 이 언어의 한계를 깨고자 시도하는 수단중 하나인거죠.
직업군인 고길동씨는 부인, 딸과 함께 살고 있다. 고길동은 부인을 사랑한다.
고길동은 그의 딸을 사랑한다.
고길동은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다.
고길동은 부하 병사들을 사랑한다.
고길동은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난 첫사랑 동창생을 사랑한다.
제가 만든 가상의 인물 고길동씨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물론 각각은 전부 사랑의 스타일이라던지 모습 및 그 내용이 전부 다릅니다. 모두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되고 있지만 각각은 사실상 다른 감정들입니다. 이 다른 감정들을 확연하게 구분되게 표현하려면 단순히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무언가 다른 방법이 필요한거지요.
사실 이러한 “언어의 한계” 문제는 여러분도 일상생활에서 흔히 겪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에서 언어가 가진 한계 때문에 수많은 오해를 겪곤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마음을 절실하게 말로 표현하는데 정작 상대방은 시큰둥하는 경우를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예술가는 언어의 한계를 깨고자 노력하는 사람
진지한 예술가들은 모두 언어의 한계를 깨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만약 예술가를 자청하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가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이 주제, 즉 언어의 한계에 대해서 고민해본적도 없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그는 예술가라 보기 힘든 사람입니다. 그만큼 이 주제는 예술과 땔래야 땔수가 없는 매우 중요한거지요.👍
이것은 예술 말고 다른 분야와 비교할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과학자는 언어의 한계내에서 머물기를 자청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과학자가 언어의 밖에서 무언가를 연구 하려고 한다면 이 경우는 오히려 사이비 과학자가 됩니다. 즉, 과학자는 오로지 언어(주로 수식이며, 수식도 언어를 기호화 한것이므로 언어의 일종입니다)로만 이야기하며, 언어로 이야기할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애당초 아얘 입을 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과학은 신이나 영혼같은 것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지요.
어쨋든 예술가들이 어떻게 이 언어의 한계를 돌파하려고 노력하는지가 문제되겠는데, 일단 소설가와 시인같은 문학가들은 언어를 여차저차 잘 사용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문학은 말을 쓰는 것이니 당연한 소리입니다.😆 반면에 “이렇게 한계가 있는 언어 따위는 버려버리자! 다른 수단을 써야한다!” 고 주장하는 예술가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음악가, 화가, 무용가들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영화감독들은 어떨까요? 교묘하게도 영화는 언어적 수단(대사)과 비언어적 수단(영상, 음악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우와! 그렇다면 영화감독들은 무지 유리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수단을 모두 쓸수 있으니 말이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생이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마치 짬뽕하고 짜장면하고 어설프게 섞어놓은 짬짜면이 생각만큼 맛있지는 않듯이 두 가지 수단을 합쳐놓았다고 무조건 유리한 것은 아닌거지요.
언어의 한계를 깨는 영화의 노력들
언어의 한계가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많은 영화감독들이 이 주제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표현수단으로서 고민하는것을 넘어서서 아얘 이 주제 자체로 영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몇몇 감독들을 열거하자면,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하마구치 류스케, 홍상수 감독 등의 작품에서 언어에 대한 고민이 특별히 묻어나오는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화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언어의 한계에 도전할수 있을까요? 첫번째 방법은 비언어적 수단을 쓰는겁니다. 즉, 영상이나 음악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몽타주나 미장센 기법이 좋은 수단이 될수 있겠습니다. 아래는 이러한 노력이 잘 드러나는 영상인데, 크리스 마커 감독의 <환송대>란 작품입니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영화와는 다르게 정지된 쇼트들을 이어붙여 마치 동화책처럼 영상을 구성하여 감독이 의도하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써놓은 감상문이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링크)
두번째 방법은 언어에 한계가 있다고 언어를 무시하지 말고, 그것을 정성들여 잘 활용해보자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역발상이라고 할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무언가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혹을 느낍니다. 이것은 비행기가 추락해서 사고가 났다면 비행기를 못타게 아얘 없애버리는 것만큼 황당한 방식입니다.
실제로 일부 영화감독들은 언어에 대해 그다지 깊은 고찰없이 막연하게 문제가 있다는 의식만 가진채 성급하게 비언어적 수단으로 도피하는 결정을 하곤 합니다. 이것은 회를 뜨는 요리사가 칼이 잘 안든다고 칼을 죄다 버려버리고 도끼나 망치를 써보면 어떨까 고민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때는 그냥 칼을 잘 갈아 쓰면 되는것인데 말이죠.😅
아래는 언어적 수단, 즉 대사를 아주 잘 구성하여 훌륭하게 영화적 표현을 한 사례입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라이즈>인데, 대사의 힘을 느낄수 있는 좋은 작품이니 꼭 영화 전체를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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