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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지난편의 연습문제를 검토할 시간입니다. 다들 생각해보셨나 모르겠군요.😀
연습문제의 검토
사실 이 사진은 수년전 부터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사진입니다. 이미 보셨던 분도 계실껍니다. 저 또한 인터넷을 하면서 우연찮게 두세번은 만났던거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선생님이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서 아이들에게 문제를 낸 것 같진 않습니다. 일단 선생님의 의도는 곧이 곧대로 아이들에게 “너네들이 이 가난한 아이보다 훨씬 좋은 조건이니 고마운줄 알고 행복하게 살아라”라는 메세지를 주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위 아이는 선생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답했네요. 아이의 답을 간단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나보다 불행한 사람을 보고 내가 행복한 것은 악하다. 우리는 불행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전 위 사진을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시기에 두세번 봤었는데, 그때마다 위 사진을 본 여러 네티즌의 반응은 100% 모두 동일했습니다. 네티즌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얼마나 이기적인가? 아이의 생각이 참 착하다. 이 아이의 선량함을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한다”
여러분도 혹시 위 네티즌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셨나요? 저는 위 생각이 진실과 굉장히 큰 격차가 있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봅니다. 지금부터 위 학생의 생각을 자세히 분석해 보겠습니다. 조금 지루하더라도 힘을 냅시다! 😆
먼저, 아이의 답변에는 자신의 감정상태에 대한 진술이 전혀 없습니다. 사실 선생님이 내준 문제는 “행복”이라는 감정에 대한 질문인데도 말이죠. 아이의 답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에 대한 당위 혹은 의무에 대한 도덕률을 단순히 나열한 것입니다. 즉 앞뒤 다 자르고 단순히 “우리 차.카.게. 살자” 한마디 한것에 불과합니다. 정상적인 유치원, 초등학교 도덕 관련 수업을 듣고 약간의 센스만 있다면 저 정도 답변은 사실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아주 대단한 것은 아니지요. 이 지점에서 우리들이 흔히 저지르는 한가지 실수가 발견되는데, 우리는 본능적으로 “아이들의 행동을 굉장히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A. “엄마! 올해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뭐 주실까?” — 김서아(8세, 여아)
B. “아들! 올해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뭐 주실까?” — 김말자(80세, 할머니)
우리는 A를 듣고서 “참 귀엽다. 순수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B를 들으면 귀엽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엄마가 드디어 치매에 걸린건가?”하고 당황하겠지요. 왜 완전히 똑같은 발언을 하는데 우리의 감정이 달라질까요? 두 사람의 정신 상태는 완전히 동일한데 왜 우리의 판단이 달라지는 걸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가지를 들자면 단순히 위 두사람의 겉모습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명은 작고 앙증맞게 생겼고, 한명은 쭈글쭈글한 피부에 볼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B와 달리 A에서는 아이의 외형 때문에 “귀여움”이란 느낌을 받게 되고 그 느낌이 아이의 비논리적인 진술의 가치를 귀여움으로 휘감아 과대평가하게 만듭니다. 요약하자면, 이 세상 아이들은 모두 그냥 “무지”한거지 “순수”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귀여운 외형이 우리의 판단을 흐트려 놓아 무지한 말이 마치 귀여운 말처럼 들리게 착각하게 만드는거죠. 참고로 이런 착각은 실제 아동교육에 있어서 해로움을 불러일으키는데, 이와 관련하여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말 — “아이에게 산타가 있다는 희망을 주기보다는 산타가 정말 있는 것인지 탐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 은 경청 해볼만 합니다.
다시 연습 문제로 돌아가서 이번엔 학생이 답안에서 누락했던 “감정”에 대한 고찰을 계속 이어가보도록 합시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위 사진처럼 불행한 사람을 본다면 서로 반대되는 두가지 감정을 동시에 갖게 됩니다. 하나는 “행복함”이고, 다른 하나는 “불행함”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가지 감정이 동시에 든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기서 “나는 행복함이란 감정은 전혀 안든다”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그분들은 자신의 감정을 단 한번도 심도깊게 관찰해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뇌 구조상 필연적으로 발현될 수 밖에 없는 감정입니다. 테레사 수녀, 성철스님을 비롯해 그 누구라도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일뿐이지 본능적으로 불행한 사람을 보면 순간적으로 그 사람과 나의 처지를 부지불식간에 비교하게 되고 그로부터 약간의 안도감과 편안한 느낌, 혹은 여유와 같은 “행복감”과 스쳐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행복감이 비윤리적인 것일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겁니다. 두가지 이유를 들수 있겠는데 첫째는,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은 우리 마음대로 할수 있는게 아니고 자동적이라는 점, 둘째는 내가 위 사진속의 가난한 아이를 보고 행복감을 아무리 많이 느껴도, 저 아이의 먹을 것이 준다거나 더 가난해 진다거나 하는등의 실질적인 피해가 없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제 말은 결국 “불행한 사람을 보고서 내가 행복해도 괜찮다”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대중이 보편적으로 갖는 감정과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뭔가 찝찝하고 나쁜 놈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사실 저도 위에 써놓고 보니 제가 나쁜놈 된거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것도 역시 인간이 가진 뿌리 깊은 착각인데 이 착각은 저번편에서 다루었던 “예술은 꿈이다”라는 이야기와 동일한 소리입니다. 즉, 예술과 현실세계를 구분못하고 착각하듯이, 내 머릿속의 감정과 생각을 현실세계와 혼동하는 것이지요.
“너가 불행해지면 내가 더 행복해진다! 음하하하” 이러면서 가난한 아이를 찾아가 그나마 있던 먹을것을 빼앗고 행패를 부린다면, 즉, 현실세계에서 행동으로 타인의 불행을 야기시킨다면 그것은 비윤리적이라고 보아야 하겠지만 단지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작용만으로는 현실세계의 그 누구도 피해가 가지 않으므로 일단은 비윤리적이라고 보기 힘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불행한 사람을 보았을때 느껴지는 또다른 감정인 “불행함”에 대해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위 가난한 아이를 보았을때 우리는 “끔찍함, 불쌍함, 안쓰러움, 동정”등의 감정을 느낍니다. 이 감정은 실제 저 아이를 만났을때 돈을 주는 행위를 만들어 낼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일단 이 감정은 타인의 행복도를 높이는(아이가 돈을 받았으니) 동기가 되므로 좋게 평가할 여지가 있습니다. 허나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언뜻 선량하게 보이는 이 감정도 사실 굉장히 의문스러운 여지가 있습니다. 진짜 선량한 감정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것이지요. 이에 대한 수많은 학자(예를 들면 스피노자, 니체 등등)들의 논의가 있습니다. 이글에서 모두 소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일단 짧게 제 의견만 밝히고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위 동정이라는 감정이 아주 순도높은 선량한 감정은 아니다”라고 판단합니다. 불행한 사람을 보면 인간은 마치 자신이 그 불행 속에 빠진 것 같은 가상의 체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다친 사람을 보면 마치 내가 다친 것처럼 순간적으로 끔찍함을 느끼는거죠. 따라서 이 감정은 사실은 나를 향하고 있는 이기적인 동기에서 유발된 것입니다. 상대방을 정말로 순수하게 걱정하는 것은 아닌거죠. 즉, 우리는 위 아이의 모습을 보면 안타까움, 끔직함 등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아이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면서 걱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위 논점과 관련된 영화 하나를 잠시 보겠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소설가의 영화>라는 작품입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을 그의 사생활과 연관지어서 “자기 변명”으로 보시는 분들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기 인생을 어느정도 참조하여 모티브 삼기는 하겠지만, 그가 마치 일기장 쓰려고 영화를 만드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다른 감독이 그러하듯, 일반적인 보통사람들의 삶을 위해 자신의 작품을 적용시키는 것을 염두하고 만들어지는 거죠.
극중에서 권해효는 활동이 뜸한 김민희를 걱정하는 듯한 발언을 계속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걱정해 주는 걸까요? 연습 문제에서 처럼 그는 순수하게 걱정하는 마음보다는 아마도 여러 불순물이 섞인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이에 이혜영이 권해효에게 따지면서 멋진 대사를 한마디 하네요. “김민희 본인 보다 김민희의 인생을 더 사랑하는 것이냐?”. 네 맞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우리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없지요. 부모, 자식, 배우자, 애인 그 누구도 내 인생을 나보다 더 사랑하지는 못합니다.
다시 연습문제로 돌아가도록 하죠. 우리는 연습문제의 “감정”에 대한 부분은 다 살펴봤고, 이제 “당위”에 대한 부분을 검토할 차례입니다. 이 부분은 이미 위 학생이 잘 답변해 놓았습니다. 가난한 아이를 도와주면 되는거죠. 그런데 여기에도 따져볼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를 개인적으로 돈을 주어 도와줄수도 있고, 아니면 사회적인 차원에서 복지제도를 만들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식이든간에 위에서 살펴본 우리가 가난한 아이를 볼때 느끼는 “불행감”을 원동력 삼아 도와 줄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감정은 앞에서 말했듯이 굉장히 의심스럽고 혼탁한 감정입니다.
저는 아얘 특정인에 대한 감정에 기반을 두지 않고서도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즉 “감정”이 아닌, “이성”을 원동력 삼아 도와주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여러가지 방식이 있겠지만 가장 흔한 예를 들면 “공리주의”가 있지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즉 행복해지는 사람이 많은 것이 합리적이니까 가난한 사람에게 지원을 하여 사회 전체의 행복도를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는 혼탁한 감정에 의존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분명한 이성에 기반하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이제 문제를 다 살펴봤으니 아동 교육적인 측면에서 짧게 네티즌들의 생각을 평가해보죠. 저는 네티즌들처럼 위 학생을 칭찬한다면 교육적으로 매우 해롭다고 봅니다. 저런 칭찬을 받은 아이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진솔하게 돌이켜 볼 기회를 잃게 되고 자신의 마음속이 정말로 “이상적인 선량함”으로 꽉 차 있다고 착각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아이가 성장한다면 성인이 되어 그리 선량하지 않은 마음과, 이상적으로 선량한 생각이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쉽게 말해 뭔가 부조화스럽게 되는거죠. 이러한 부조화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지속적인 긴장감을 만들고 부자연스럽고 과장된 행동을 유발시킬껍니다.
제가 선생님이라면 아이에게, “너는 정말로 가난한 아이를 보고 행복한 느낌이 전혀 없느냐? 마음속을 잘 관찰해봐라. 선생님은 살짝 안심 비슷한 느낌이 드는데 말이다. 너가 착각을 하나본데, 마음속으로는 나쁜 생각이 들어도 상관이 없단다. 생각은 자동이라 그건 너가 어쩔수 없는 일이다. 다만 행동만 하지 않으면 된다. 선생님도 나쁜 생각 많이 한다. 아이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너의 말은 훌륭한 생각이다. 왜냐면 사회에 행복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좋은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돕는 것과 너 마음속에서 자동으로 벌어지는 일은 별개의 일이니 구분을 할줄 알아야 한다” 이 정도로 얘기해줄 것 같습니다.
사회적 편견에 도전하는 예술가들
지금까지 연습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 제 주장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제 말이 정답이란 소리가 아닙니다. 이것도 그냥 하나의 주장일 뿐이죠. 혹시 여러분중에서 제 주장, 네티즌의 생각, 선생님의 출제 의도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신분이 계시다면 아래 댓글로 알려주시면 좋겠네요. 제 유튜브 채널을 통해 들어오신 분이라면 유튜브 댓글로 남겨주셔도 좋습니다. 그 새로운 생각이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위와 같이 언뜻 보기에는 아무 의문도 없이 간단해 보이는 문제에도 사실은 따져야 할 것들이 정말 수없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을 따지지 않고서 단순히 우리가 가진 습관에 의존한다면 수박 겉핥기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게 되고, 이런식으로는 진실에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진지한 예술가들은 — 물론 영화감독들을 포함하여 — 대체로 당대의 사회적 편견이나 관습에 도전하려는 욕망으로 철철 넘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돈이나 명성을 바라고 예술을 하는게 아니라 단지 이런 도전이 즐거워서 예술을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관객)들은 이러한 편견이나 관습에서 벗어나 사고를 아주 유연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예술 작품들을 이해하기는 커녕 그것들은 굉장히 괴상한 쓸모없는 것들로 보일뿐이겠지요.
영화 감독들 보다 우리들 머리가 더욱 말랑말랑하면 아주 좋겠지만,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닐껍니다. 왜냐면 감독들이 밥먹고 하는 일이란게 결국 머리를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일들이거든요. 그래도 최소한 아주 뒤처지지는 않게 감독들과 보조는 맞추어줘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열린 마음을 갖고 개방적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습성을 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새로운 파트로 들어가 영화의 표현 형식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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