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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자유에는 한계가 있을까?
지난 시간에 이어 “영화의 생각(주제, 메세지)”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먼저 한가지 상상을 해보도록 하죠. 어느날 박찬욱, 봉준호, 홍상수, 이창동 감독이 의기투합하여 한국 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자며 각자 단편 영화 하나씩을 연출하여 합친 옴니버스 영화를 공동으로 제작하기로 합니다. 이 가상의 영화들은 모두 “사랑”이란 주제로 만들어졌는데, 각 단편들의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친어머니와 친아들의 에로틱한 러브 스토리. 천륜도 이들의 사랑을 방해할 수 없다!
둘. 친일 청년 만덕이와 식민지 조선 총독의 딸 아야꼬의 아름다운 로맨스. 3.1운동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쿠라 같은 사랑 이야기!
셋. 정력왕 세종대왕이 20명의 후궁과 펼치는 궁중 난교 파티. 음기 만땅한 세종의 뇌리에 갑자기 한글창제라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는데..
넷. 유부남 김 목사와 모 사찰에서 수행중인 성욕스님, 그리고 카톨릭 수녀 박마리아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교통비를 절약하기 위해 셋은 함께 동거를 하기로 결심한다. 이들의 쓰리섬은 진정한 종교의 합일로 나아갈 것인가?
이 영화가 개봉하자 당연하게도 난리가 납니다. 여기서 잠깐, 어느 인터넷 게시판을 들러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펴볼까요?
네티즌 1 :
네티즌2:
“봉준호 이 친일파 색히 일본만화 이야기할때 부터 내가 알아봤지! 친일 반민족주의자 쪽발이 일본가서 살아!”
네티즌3:
“상수형! 형은 맨날 자기 영화처럼 살던데, 이제 후궁 20명들이시나요?”
아아.. 예상대로 반응이 너무 안좋군요. 그만 알아 보겠습니다.😥
사실 위와 같은 영화가 정말로 나온다면 아마 개봉도 하지 못할껍니다. “OO바르게사는사람들의모임, OO종교단체” 같은 곳에서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할거거든요. 아니, 애당초 메이저 감독들은 저런 영화를 만들리가 없습니다. 밥줄 끊길 것을 잘 알기에 무의식적으로 자기검열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말그대로 그냥 상상속의 이야기였습니다.
위 영화들을 살펴보면 모두 도덕률이라던지, 민족주의, 종교적 관념등 어떤 신성한 무언가를 자극하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들의 마음속을 상당히 거슬리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만약 위와 같은 영화가 정말로 나온다면 어떻게 하실껀가요? 참고로 저는 위 영화가 실제로 개봉되어도 개의치 않겠습니다. 저는 모자간의 에로스나 친일청년의 사랑, 세종대왕의 난교파티에 딱히 흥미가 느껴지지도 않고, 위 네 분의 감독들에게 특별한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저런 영화, 혹은 더 심한 영화가 얼마든지 나와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위 영화의 상영을 금지하는 법적인 청구를 하면 분노할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흔해 빠진 식상한 주제일수도 있는데, 바로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지의 문제입니다. 진지한 영화 관객이라면 꼭 생각하고 넘어가야할 주제이지요. 어느 국가나 표현의 제약이 있긴 합니다. 이를테면 미국의 경우는 어린아이들이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입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기로 제작자들 사이에서 암묵적인 합의를 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 영화에서는 아이들이 잔인하게 죽는다거나 하는 장면은 잘 안나오지요.
우리나라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서양권 국가들 보다 제약이 더 심한 것 같은데, 이를 테면 TV드라마에서 흡연 장면은 아얘 나오지 않거나 모자이크 처리를 합니다. 담배를 피는 행위는 캐릭터 묘사를 위해 아주 유용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TV창작자들은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무기를 하나 잃은 셈이 되지요.
아무튼 저같은 경우는 영화의 주제에는 어떠한 제약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완전히 무제한의 자유”를 줘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요? 자유를 사랑하는 쿨병에라도 걸린걸까요?😱😱 아무래도 중요한 것은 결론보다는 “왜”, 즉 그 이유가 되겠지요? 지금부터 그 이유에 대해 알아봅시다.😉
예술은 진리를 위한 최후의 안전 장치
예술에 무제한의 자유를 줘야 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정반대로 ‘예술을 제약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이 특성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 특성은 예술의 가치를 낮게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예술작품을 “시간때우기용, 오락용” 정도로 한정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시간때우고 오락을 즐기는게 잘못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단지 딱 오락용까지만 “한정”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술의 가치는 그 정도 쯤은 아득히 뛰어넘습니다. 저는 예술은 “진리를 위한 최후의 안전장치”로 생각하는데, 이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다른 두 축인 과학과 철학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과학과 철학, 그리고 예술은 그 생각의 방식이 확연하게 다릅니다. 좀 거창한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역사적으로 이 세 기둥은 각자의 “다른” 방식으로 어떤 “진리”를 포착하여 인류 문명을 앞으로 전진 시켜왔습니다. 이중 가장 나중에 등장했지만, 가장 강력한 도구인 과학은 실험을 통해 “입증”을 하는 방식을 씁니다. 그리고 철학은 “논리”로 입증하는 방식을 씁니다. 입증의 방식이 다를 뿐이지 과학과 철학은 어쨋든 “입증”을 한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제가 “에너지 보존 법칙은 틀렸음에 분명해. 왜냐면 내 안에 꿈틀대는 뚜렷한 직관의 힘이 이 법칙이 틀렸다는 느낌을 마구 주거든!” 이런 주장을 한다면, 실험으로 입증되지 않았기에 과학에서는 무시됩니다. 역시 논리로 입증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철학에서도 무시됩니다. 즉, 과학과 철학은 아주 엄격하고 까다로운거죠. 어지간한 생각은 받아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만약 어떤 진리가 있는데, 그것이 정말로 참이고, 게다가 그것이 우리 인류문명의 생존을 위해 엄청나게 중요한 진리라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아직 어떤 입증을 하지는 못했거나, 혹은 애당초 입증이 불가능하다고 가정해보죠. 만약 과학과 철학만 있다면 이런 경우 이 중요한 진리는 안타깝게도 폐기처분이 됩니다. 영영 잃게 되는거죠.
그러나 다행히도 예술이 있습니다. 예술은 어떠한 입증이 필요 없습니다. 과학과 철학이 아주 촘촘한 필터라면, 예술은 듬성듬성 구멍이 있는 필터라 다 통과해냅니다. 예술은 완전히 자유로워 모든 생각을 일단은 다 잡아냅니다. 물론 입증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과학이나 철학적 생각보다는 사회에서 인정이 덜 되기는 할 것입니다. 그래도 만에 하나 영영 사라질 생각들이 예술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점이 제가 예술을 “최후의 안전장치”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 안전장치가 정상적으로 제대로 동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최대한 무제한에 가까운 자유가 예술에 주어져야 하는거죠.
여기까지가 제 주장인데, 언뜻보면 제 주장은 마치 예술이 과학과 철학을 보완하는 수준으로 보입니다. 맞습니다. 저는 사실 예술을 과학과 철학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굳이 세 기둥을 비교하자면 과학과 철학이 좀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와 반대로 예술을 으뜸으로 여기는 분들도 있을겁니다. 즉, “예술만이 유일하게 진짜 진리를 잡아낼 수 있다!” 이렇게 보는겁니다. 쉽게 말해 “예술지상주의자”라고나 할까요? 물론 그런 생각을 가지셔도 좋습니다. 어짜피 이 문제에 있어서 결론은 동일하거든요.만약 여러분이 예술지상주의자라면 저와 같은 이유로, 오히려 저보다 더 예술의 자유를 옹호할테니까 말이죠.👍
다음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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