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이를 위한 한줄 소개 :
영화의 안과 밖에서 대화의 힘을 확인한다.
1.평론
이 영화는 모든 예술분야에 있어서 자리잡고 있는 한가지 큰 편향을 깨뜨리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 바로 언어의 한계에 대한 것인데, 이 작품은 그 한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언어의 가능성을 영화적으로 실증해 보인다. 이는 대다수의 진지한 예술가들이 반-언어로 도피하는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것이 이 작품이 “영화의 밖”에서 보여주는 “대화”의 힘이다. 한편 사랑의 한 가능성으로서의 대화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어떠한 에로스적 사랑도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보수적이고 허황된 형태의 이른바 “낭만적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도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basic, fundamental 둘 모두의 의미에서의) 대화만을 강조하고 그것만으로 충분히 사랑이 성립될 수 있음을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이 가진 “대화의 힘”은 “영화의 안”에서도 확인된다.
대화 위주의 구조를 즐겨 갖는 다른 영화 감독들의 영화, 이를테면 에릭 로메르나 홍상수의 작품들 보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우수하게 느껴진다. 아주 기본적인 요소에 충실하여 더 간결하므로 역설적으로 더 우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저예산 독립영화를 위한 레퍼런스 혹은 플랫폼의 한 형태가 될 만한 모범 사례라고 말할수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하나의 장소를 탐방하며 줄기차게 대화를 하는 구조인데, 이 구조를 그대로 따라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기본적인 형태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면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미국 남자와 예술적 소양을 가진 낭만적인 유럽 여자가 여행도중 우연히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는 스토리다. 언뜻 보면 두 남녀가 우연히 첫 눈에 반한다는 운명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 같아 보인다. 하지만 그런 동화같은 러브스토리는 아니고, 영화속 두 남녀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최선을 다해 대화하고 아주 천천히 서로에게 젖어든다. 충분히 현실적인 로맨스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남자 감독에 의해 연출된 작품이지만 대단히 여성적인 입장에서 만들어진 영화라 볼수도 있겠다.
이 영화는 극의 대부분을 두 사람의 대화로 채우고 있는데, 단순히 양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모범적인 대사의 구성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영화속 대화의 구조를 간단히 도식화해보면, 기능적으로 대사들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역할을 하게 된다. 먼저 1)두 사람의 개성을 보여주고, 2)두 사람의 사랑의 감정과 무드를 표현하며, 3)감독이 가진 사랑에 대한 철학을 그들의 말을 빌려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 역할의 “직접성”이 문제될 수 있다. 영화가 설교적으로 비추어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러한 위험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피해가는데, 두 사람간의 편하고 자연스러운 대화 분위기를 충분히 조성한 후, 이 분위기에 편승하여 메세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전달에 따른 거부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두 남녀는 매우 많은 대화를 나누는데, 이 글에서는 “독특함”이란 기준에 따라 두가지만 살펴보겠다. 먼저 셀린느는 페미니즘에 대한 재미있는 말을 한다. 그녀는 페미니즘이 남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여자를 성적으로 개방시켜 남자들이 보다 많은 여자랑 자유롭게 섹스를 하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는 말이긴 하지만 그녀가 주장하는 페미니즘과 우리나라에서 현재 유행하는 페미니즘의 양상이 다르다는 측면에서 재미있는 부분이다. 즉 유럽의 페미니즘(참고로 유럽에서 페미니즘이 유행하던 시기는 수십년 전이다)은 “여성의 성적 개방”을 주장하는데 반해서 한국의 페미니즘은 오히려 거꾸로 “여성의 성적 개방”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굉장히 독특한 현상이라 말할수 있는데 굳이 이름을 붙여 보면 “방어적 페미니즘”이랄까? 아무튼 짧게 생각해보면 애당초 남녀를 떠나서 우리나라는 성적으로 폐쇄되어 있는 문화이고 이 영향으로 여성의 성은 “누리는 권리(enjoying)”가 아니라 “지키는 권리(keeping)”로 여성들 스스로도 오해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다음으로 셀린느는 “신은 우리 안이 아니라(사실 이것은 불교적인 신 관념에 가깝다. 기독교적이 아니라는 것도 재미있는 점이다)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는 말도 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 신적인 무언가가 있단 말인데 물론 이것은 사랑일 것이다. 결국 사랑이 곧 신이 되는 셈이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PS. 여담으로 이 영화는 동유럽 특유의 장소적 분위기(뭔가 고풍스러우면서도 음습하고 축축한)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유럽여행을 앞두고 있다던가 아니면 이미 다녀온 사람이 지난 여행을 회상하고자 하는 목적으로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