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1.평론
영화는 한 여자와 그녀에 얽힌 두 남자의 모습을 어떠한 판단없이 스크린 위에 놓아둔채 “보여” 주려고 노력한다. 유지태는 대학 교수를 꿈꾸는 유부남으로 남들의 칭찬을 갈망하고 주목받고 싶어하는 심리가 큰 사람이다. 자신의 성욕에 솔직하고 이러한 자신의 솔직함에 자부심을 가진듯 하지만 왠지 공허해 보인다. 성현아와의 섹스 도중 그녀의 신음소리가 이쁘다, 피부가 곱다는 등 그녀를 마치 관찰자의 시각에서 예술작품 대하듯 감상한다. 즉, 상대와 합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김태우는 성현아와 공식적으로 사귀던 남자로 미국 유학을 가면서 자연히 그녀와 헤어지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억압되고 위축된 인물로 그려지는데, 강간을 당했다는 성현아의 성기를 닦기도 하고, 그녀와 섹스를 하며 계속 깨끗해진다는 말을 반복한다. 자신과 섹스함으로서 그녀가 정화된다는 관념적 망상을 하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 순결에 대한 집착을 보여 준다기 보다는 그가 가진 강박적인 병적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 부분이다.
이처럼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두 남성은 포용적인 모성을 상징하는 성현아에게 영화의 제목처럼 종속된다. 하지만 성현아가 두 남자 사이에서 주도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유지태에게 오럴 섹스를 제안하는데 오럴 섹스는 철저히 남성을 위한 것이다. 즉, 두 남녀의 일치된 행복이 아닌 여성의 봉사인 것이다. 성현아는 90년대 최진실이 유행시켰던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식의 여성의 허구적 주도성 정도에 위치해 있다.
홍상수 영화의 빈번한 주제로 등장하는 솔직함과 위선에 대한 내용이 이 영화에서도 다루어 진다. 유지태는 위선을 버리고 솔직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학생들과의 술자리에서 어느 여학생에게 노골적인 섹스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등의 행위를 하고, 이 때문에 학생들과 솔직함에 대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솔직함이란 소극적인 미덕일 뿐이다. 즉, 다른 미덕을 방해하지 않고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솔직한 것 그 자체만으로 딱히 어떠한 가치를 갖지는 않는 것이다. 이 솔직함이란 가치도 대중적으로 과장되는 경우가 많은데 — 특히 예술가들 사이에서 — 쉽게 말해, 대로 변에서 솔직하게 똥을 싼다고 그 행위가 어떤 대단한 가치를 갖지 않는 것과 같다. 내용 없는 솔직함은 이처럼 공허하다.
영화는 어떠한 가치 판단을 의도적으로 분명히 드러내지는 않는다. 어떤 인물이 옳은 것인지 밝히지 않는 것이다. 유지태에게 반항했던 남학생도 알고 보니 여학생을 쫒아 다니는 스토커로 묘사된다. 영화는 “그냥 그런 것이다”라는 좋게 말하면 상대주의적인, 나쁘게 말하면 허무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감독은 무의식적으로 유지태의 입장에 살짝 기우는 셈이 된다. 일반 대중의 인식은 유지태를 비난할 것이기에 그에 대한 가치판단을 유보하는 것만으로도 그를 지지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어쨋든 감독의 의식적인 의도는 “있는 그대로의 날 것”을 관객에게 그대로 보여주기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이 이 작품에서는 왠지 무의미하고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등장인물에 대한 감정 이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묘사가 지나치게 무미건조하고 객관적이라 도리어 영화적 작업 자체가 의미를 잃게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서사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 이 영화에서 유지태는 딱히 고난을 겪지 않는다. 유지태란 인물이 무언가 사회 현실과 충돌이 되어야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게 되는데 그런 것이 없어 관객은 “그냥 그렇구나” 정도로 무심하게 받아 들이게 된다.
2.좋은 영상의 사례
유지태가 축구를 하는 제자들을 구경하는 사이에 잠시 졸면서 꾸는 꿈을 표현한 영상이다. 도입부와 영상의 끝은 유지태가 벤치에 앉아 있는 쇼트로서 동일하지만 좌우 방향이 정확히 반대로서 이는 꿈으로의 도입과 퇴로를 분명히 구분지워준다.
홍상수 감독의 많은 작품에서 꿈이 활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꿈을 개인의 무의식을 담은 정신작용으로서 대단히 가치있게 보는 정신분석학의 입장과 동일하다(사실 현대에는 이러한 입장은 상식이므로 딱히 그의 작품이 정신분석학적이라 평가할 이유는 없다). 그의 작품에서의 꿈은 독특하게 표현되는데, 의도적으로 현실과 구분을 짓지 않고 현실의 씬과 꿈의 씬을 뒤섞어버리는 것이다. 여기서도 꿈이 시작될때 어떠한 암시도 주지 않고 현실처럼 묘사되고 있다. 다만, 예민한 관객이라면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눈치 챌수 있는데, 유지태가 하고 있던 목도리가 사라져 있고, 제자들의 반응이 상당히 부자연스럽고 과장되어 있다는 점이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흔히 꿈이 현실을 왜곡하고 과장한다는 특성을 충실히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꿈과 현실을 뒤섞는 표현방식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를 “꿈이 현실이요, 현실이 곧 꿈이다”식의 현실과 꿈의 경계를 허무는 양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취급할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이런식의 형이상학적 설명은 무의미한 경우가 많다. 이보다는 질문을 “꿈과 현실을 꼭 구분지어 표현해야만 하는가?” 라고 뒤집어 보는 것이 좋겠다. 실제로 우리가 꿈을 꿀때는 현실과 꿈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으며, 꿈에서 막 깨는 순간에는 특히 그러하다. 즉, 현실 세계에서의 꿈은 현실과 명확한 경계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홍상수 감독의 표현방식이 보다 사실주의에 입각한 꿈의 표현이라 말할수 있다. 아울러 관객에게는 꿈과 현실을 예고 없이 오가는 가운데 약간의 심리적 충격을 받게 되어 영화적 표현 양식으로서도 좀더 효과적이다.
유지태의 꿈속에서 제자들은 그를 과하게 칭찬하고 좋아한다. 이는 유지태가 남에게 주목을 받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무의식적 갈망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여학생이 준 목도리를 두르며 그는 냄새가 좋다고 말하는데, 이는 사물에 성적인 욕망이 투영되는 전형적인 페티시즘적 성향을 표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