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1.평론
고독에 대한 탁월한 묘사가 돋보이는 에드워드 양 감독의 초기작이다. 영화속 인물들이 겪는 어려움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뚜렷하고 분명한 원인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아룽이 야구선수의 꿈을 포기한 것도, 수첸이 실직하게 된 것도 고독의 와중에 겪게 되는 하나의 단편적인 사건일 뿐이다. 결국 실존적 고독이라고 부를수 밖에 없는 걸까? 아무튼, 이들이 갖는 고립된 인간관계는 고독의 문제를 더욱 가중시킨다. 두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은 서로 연결된 것 같지만 사실은 한없이 부실하고 형해화된 모습을 보인다. 영화속에서 등장 인물들의 대화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각자가 자신의 말을 할 뿐이다. 이는 불립문자 이심전심 따위가 아니라 대화의 단절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각자는 각자의 테두리안에서 고독하게 고립되어 있다.아룽이 주변 인물들에게 배푸는 선의도 사실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일 뿐이다.
영화는 이 고독을 개인적 문제를 넘는 사회적인 차원으로 보기도 한다. 즉, 현대 대만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보는 것이다. 영화속에서 미국과 일본이 문제의 탈출구이자 이상향의 하나로서 제시되며, 두 주인공들은 한때 이 곳에서 도피처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아룽의 말처럼 이는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환상일 뿐이다. 해외로 떠난다해도 잠시 동안의 위안만을 얻은채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아룽은 칼에 찔려 죽게 되는데, 이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장면이다. 그는 바로 죽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 간격을 두고 서서히 죽어간다. 영화는 그의 죽음 마저도 정적으로 여백을 두고 묘사하는데, 묘한 긴장감과 함께 영화의 전체적인 톤을 유지하여 작품이 갖는 정서를 깨뜨리지 않고 끝까지 가져간다. 그러나 이 장면이 갖는 미덕은 단순히 이같은 형식적 측면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상 아룽은 자살을 한 것이고, 이 부작위에 의한 자살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표현했다는 점이 이 장면이 그토록 아름다운 이유다. 그의 죽음은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의 세계에 굴복하고 자살하는 자를 연상케 하는데, 이점에서 영화는 일단 문제의 제기에서 끝을 맺는 셈이 된다.
이 영화는 왜 지루하지 않은가?
이 영화는 대사가 거의 없고 정적인 연출을 하였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고 관객을 사로 잡는 연출을 보여준다. 그 이유를 분석해보자면, 먼저 여백이 큰 연기의 이면을 통해 의미를 더 크게 전달하고 있고(여기서 배우들의 중요성이 커지는데, 평범한 외모의 배우들이 영화의 여백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둘째로, 간결하고 정갈한,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관객의 시선을 끄는 덕분이다. 마지막으로 주제 자체가 현대인의 고독이고 이것을 영화의 초반부터 분명하게 들어내는데, 이 주제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이므로 관객의 주의를 계속 집중시킬수 있는 것이다.
에릭 로메르 감독의 녹색광선과의 비교
로메르 감독의 녹색광선(영화 리뷰 링크 참고)도 인간의 고독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두 영화를 간단히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녹색광선은 본 영화와 완전히 반대로 수많은 대화들과 주인공의 행위, 그리고 다수의 사건들을 통해 고독을 표현하였다. 본 영화는 인물들간의 관계를 통해 고독이 묘사되는데, 녹색광선은 관계보다는 주인공 본인에 집중하여 그녀의 직접적인 심리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마지막으로 녹색광선에서의 고독은 좀더 실존주의 철학적이며, 이 고독은 지극히 프랑스적인 방식으로 영화상에서 “해결”된다. 하지만 본 영화에서의 고독의 문제는 미완된채로 남겨진다.
2.좋은 영상의 사례
#1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익스트림) 롱샷이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 그중 두 장면을 추려보았다. 첫번째 장면은 바다를 배경으로 롱샷 위주로 연출하여 등장인물이 느끼는 해방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두번째 장면은 모던한 빌딩 사무실 공간을 롱샷으로 촬영한 것인데, 도회적인 배경이 부각되고 상대적으로 인물이 작게 표현됨으로써 도시라는 공간속에서 위축되는 차가운 감정이 잘 살아나고 있다.
#2
빛과 어둠이 잘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미장센의 사례들이다. 첫장면은 옥상의 네온사인을 배경으로하는 장면인데, 소외된 개인과 화려하게 돌아가는 무관심한 세상을 대조하여, 개인의 소외감을 더 가중시키는 효과를 낸다. 아울러 이 영화에서는 80년대 경제대국으로서의 일본이 이상적 도피처로서 등장하고 있다. 네온사인이 후지필름, NEC, 소니등 모두 일본기업이라는 것도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두번째 장면 역시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전조등이 비치는 어두운 건물들을 배경으로 하여 차갑고 쓸쓸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묘사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