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1.평론
홍상수 감독이 2011년에 발표한 단편영화로, 짧지만 그의 작품활동 중반기의 분위기와 특성이 그대로 살아 있는 영화다. 등장인물이 하루에 할일이라는 형식으로 계획(시나리오)을 만들고, 그 계획이 영화에 녹아들어가 영화의 서사가 진행되는 독특한 구조를 띄고 있다.
사실 영화속 이야기는 “계획의 힘”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영화속에서 우연히 만난 한 감독에 의해 진행되는셈이 되는데, 결국 이 영화는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삶”이란 주제와 함께 “우연적 창작”을 기반으로 하는 홍상수 감독 본인의 예술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연성의 힘”은 홍상수 감독의 여러 작품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예를 들어 “소설가의 영화”가 그러하다. 관련 내용 링크 참조)
영화의 후반부에서 정유미는 “엄마로 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말을 한다. 직전까지 외형상 사이좋은 모녀로 보이던 관계는 이 지점에서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파괴하는 엄마와의 관계를 남자와의 사랑을 통해 극복(혹은 도피)하려고 한다. 짧지만 기존 통념과는 다른 가족의 의미와 과장된 가족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어 인상적인 부분이다.
2.좋은 영상의 사례
#1
정유미가 하루의 계획을 종이에 적어가며 세우는 장면이다. 이후 그녀의 계획에 따라 영화 전체의 서사가 진행된다. 따라서 이 계획을 관객에게 명확히 인식시키는 것이 필요한데, 영화는 계획이 적힌 종이 자체를 한동안 비춰줌으로써 이 같은 목적을 해결하였다. 여기서 종이만을 오랜시간 비춘다면 선후의 장면과 단절된 느낌을 주고 지루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종이와 주변풍경을 오버레이하여 동시에 비춤으로서 지루함을 덜고 장면의 자연스러움을 살리고 있다.
#2
모녀와 감독, 세 명이 처음 조우하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일단 바위에 앉아 있는 감독을 지나치지만 정유미가 유준상을 인지함과 동시에 그를 패닝하여 비춘다. 곧 이어서 3자간의 대화가 시작되는데, 세명의 위치가 특징적이다. 정유미와 유준상이 마주보고 있는 중간을 윤여정이 가로 막는 위치에 서있고, 윤여정은 뒷모습만 비춰지고 있다. 이것은 현재 윤여정이 정유미와 유준상의 사이를 약하게 가로 막고 있는 미묘한 심상을 전해줌과 동시에 윤여정의 얼굴을 생략함으로서 상황의 중심이 분명히 정유미와 유준상에게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후 세 명이 식당으로 가면서 장면이 해결되는데, 이때에도 모녀는 팔짱을 끼고 퇴장함으로서 정유미와 유준상이 아직은 거리감이 있는 상태임이 암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