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즘(~ism)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발달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 먼저 사회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하나의 사상이 생긴다. 이 사상은 물론 내용적으로 좋고 그것의 의도도 좋은 것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와 유교는 간단히 말해 모두 인간을 사랑하라는 좋은 내용을 담고 있다. 각각의 사상이 생겨날 시기가 아주 어수선한 때였으니 당연히 이런 좋은 내용을 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즘은 발전이 진행될수록 점점 공식화와 교조화가 된다. 먼저 공식화는 사상이 어떤 규칙이나 패턴처럼 되는 것이다. 종국에는 초기의 생각과 의도는 사라지고 이같은 공식만이 남고 여기에 집착하게 된다. 무슨 요일에 무슨 옷을 입고 예배를 드려야 신성한 하나님의 뜻에 반하지 않을지, 제사상에 배는 동서남북 어디에 둘지, 바나나를 올릴지 말지 따위에 첨예한 논쟁을 하는 것이다.
교조화는 초기의 생각(사상)이란 성질이 믿음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일종의 종교가 되는 것인데, 교조화된 사상은 그것에서 합리적인 사고가 빠져버리고 대신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믿음이 들어차게 된다. 어째서 제사상에 그동안 배를 올렸던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한 생각은 없어지고 어쨋든 배는 꼭 올려야만 하는 것이고 안올린다는 사람은 천하의 폐륜아라고 간편하게 믿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믿음으로 대체되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상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대게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과정은 뇌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따라서 생각없이 그냥 믿어버리는 것이 간편한 일인 것이다.
아울러 이런 교조화는 사람들에게 또다른 이익을 주는데, 바로 인간의 권력욕을 대리 충족시켜준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어떤 교조에 따르는 일원이 됨으로써 자신의 권력이 발휘된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대단한 사회운동가가 범죄인이 된다던지 하는 일들을 종종 목격하곤 하는데, 이들은 딱히 변심했다기 보다는 애당초 별 생각이 없던 사람들인 것이다. 이처럼 특정 이념에 대한 사회운동을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사실 그 이념에 대한 순수한 열망보다는 단지 이 권력욕의 충족 때문인 경우도 상당히 많이 있다.
이제 페미니즘과 PC로 돌아가도록 하자. 이들 역시 위와 같은 “이즘의 발달 경과”를 그대로 겪고 있는 것 같다. 페미니즘과 PC도 그 내용과 의도는 대단히 좋다. 소수자 보호와 여성의 인권, 모두 좋은 말들이다.
그런데 이같은 이념들이 성숙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위에서 설명한 공식화와 교조화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게 된다. 초기의 생각과 의도는 희미해지고 점점 형식의 겉 껍데기와 믿음만 남는 것이다. 이를 테면, 자궁이란 단어가 남녀차별적인지 아닌지, 아이의 성을 부의 것으로 할 것인지, 모의 것으로 할 것인지, 부모 모두의 성으로 할 것인지, 모두의 성으로 할 것이라면 먼저 오는 성을 부의 것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모의 것으로 할 것인지, 영화에 게이 캐릭터를 몇 퍼센트 등장시켜야만 하는지 등등을 따지고 이에 반대하는 차별주의자를 몰아내는데 골몰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같은 “이즘의 파생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일까? 원론적인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생각을 하면 되는 것이다. 애당초 문제의 발생 원인이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말이다. 각각의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 믿음 대신 생각을 가지고 판단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앞서 말했듯이 인간이 생각을 싫어하는 것은 유구한 전통인지라 이러한 원론적인 방법으로 이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희귀한 것 같다. 대게는 사회가 충분히 변화하여 더이상 예전의 구닥다리 이즘이 쓸모가 없어졌을때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이즘이 등장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파생 문제를 따질 필요가 더 이상 없어지는 식으로 해결이 된다. 점점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줄어들어 이제는 바나나냐 배냐를 따지는 것이 별문제가 아니게 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