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이 영화는 “꿈”을 그리고 있다. 중국어, 일본어를 몰라도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고(외국인과 아무 제약없이 프리토킹하는 꿈을 당신도 언젠가 꾼적이 있을 것이다), 두 중년 남성은 어린시절의 풋사랑을 못잊어 28년동안 방황하는 비현실적인 순정남들이고, 이들은 일본 후쿠오카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동시에 한국의 어느 지하 서점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일어나는 사건들은 모두 비현실적이고 현실의 논리에서 벗어난다.
프로이트는 꿈을, 상징적 수단을 통해 욕망이 표현되어진 그 무언가로 보았다. 이 영화에서의 꿈도 이러한 “정신분석학적 상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여러 사물들로 대변되는 욕망의 상징들이 나열된다. 아울러 영화의 장면들이 단락적으로 이어져 있다던지, 하나의 장면속에 마치, 전화가 혼선되듯 갑자기 등장하는 환청과 같은 음성들도 모두 이 영화가 누군가의 꿈을 그리고 있다는 근거가 된다. 프로이트가 주장했던 왜곡,변형과 같은 꿈의 매카니즘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순이”의 꿈을 그린다. 핸드핼드기법으로 엿보듯이 촬영되어 관찰자 시점이 부각되는 장면들(우리가 꿈을 대게 3인칭 시점에서 관찰하듯 꾼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순이에게 의미있는 장소인 후쿠오카, 재일교포라는 “경계인”으로서 순이의 삶을 상징하는 사물(윤동주의 시)과 사건(놀이터에서 만난 중국인)들은 이 영화가 순이의 꿈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영화속에 등장하는 상징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일단, 제문과 해효는 어린 시절의 유치하고 풋풋했던 모습 그대로다. 그 시절 자신을 사랑했던 두 남성이 마치 시간이 멈춘듯 그대로 재현된 것임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소담과 책방 주인 유키이다. 소담은 표면적으로는 자신이 버린 딸이지만, 이와 동시에 순이의 자아를 대리로 표현하는 객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키는 순이의 자아를 직접 상징하는 객체가 된다.
제문과 해효사이에서 소담은 묘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이는 과거의 로맨스를 자신의 딸을 매개로 연극처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딸은 곧 자신이기도 하다. 엄마로서의 죄책감과 모성을 상징하는 인형을 딸인 소담에게 주지만, 그 인형은 자꾸만 소담으로부터 벗어난다. 딸과 화해 하고자 하는 욕망이 반복적으로 좌절을 겪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화해의 욕망은, 그 욕망을 표현하는 거대한 송신탑 앞에서의 소담과 순이의 키스를 통해 충족이 이루어진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정신분석학의 원리에 따라 “상징의 나열”이라는 수단으로 주제를 표현하는 상징주의적인 영화다. 그러나 그 상징의 나열이라는 방식이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단순하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즉, 여러 상징물들이 영화적 서사와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뜬 기름처럼 겉돌고 있는 느낌이다. 상징주의 연구로 유명한 마광수 교수는 그의 저서 “시학”에서 “상징을 오용하여 시를 어려운 퀴즈 문제 내듯이 쓰면 안된다”고 지적한바 있다. 영화는 상징에 함몰되어 퀴즈가 되버렸다.
다만, 세 주연 배우의 연기는 모두 나무랄데 없이 탁월하다.
오늘 (내가 좋아하지는 않는) 자크 라캉의 책, 욕망이론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주체는 높이 솟아 있으며 멀리 떨어져 있는 내부의 성(castle)을 찾아 진창 속에서 버둥거리고 있지만 놀랍게도 그 성은 이드(id)를 상징하는 것이 되고 만다.”
영화속 송신탑이 여기서의 “높이 솟아 있는 이드를 상징하는 것”이 된다. 원래의 평론에서 나는 송신탑을 욕망의 상징이라 하였는데, 욕망과 본능이 완전하게 동일하지는 않지만 조금 너그럽게 본다면 유사한 개념으로 묶일수 있을 것이다. 라캉의 위 구절은 영화 후쿠오카가 정신분석학적 이론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것을 지지해주고 있다.
장르는 다르지만, 꿈은 회화에 있어서도 주요한 소재가 되곤 한다. 살바도르 달리가 꿈을 소재로 환상적 묘사를 자주 하였던 대표적인 화가중 한사람이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에서 언급된 관련 구절을 짧게 소개한다.
“(중략) 그러나 꿈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실험은 한번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꿈 속에서는 사람과 사물이 서로 합쳐지고 그 자리를 바꾸는 이상한 느낌을 체험한다. 고양이면서도 동시에 아주머니이기도 하고 우리집 마당이 아프리카가 되기도 한다.”
달리의 그림에서의 중첩되고 왜곡된 형상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방식을 영화 후쿠오카에서도 나름 영화적 수단을 통해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