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이 영화를 본 관객은 두가지 의문점을 느끼게 된다. 첫째는, “과연 주인공 박형구의 삶은 어느 것이 진짜인가? 앞서의 형사로서의 삶인가, 아니면 이후의 교사로서의 삶인가?” 둘째는, “박형구의 인생은 어떻게 뒤바뀌게 된 것인가? 어떤 신비한 힘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을까?” 이다.
이 두가지 의문점은 감독이 교묘하게 유도한 함정에서 비롯된다. 관객은 영화 초반부의 교사 아내가 가진 신병(神病)에 주목하여 이 영화를 “미스테리 공포영화”로 바라보게 된다. 이 초반의 관점은 영화 내내 유지된다. 그리고 결말부의 불친절함에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위 의문점들은 이미 해결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답이 어떻든 아무렴 상관없다. 우리는 이 영화를 바라볼때 기존 공포영화의 고정관념을 깰 필요가 있다. 굳이 교사 아내가 어떤 “신비로운 힘”을 가졌다고 가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 그녀는 그냥 정신병자일 뿐이고, 사고는 영화속 소방서의 조사결과대로 우연한 누전으로 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박형구의 두가지 삶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가 이 영화를 위와 같이 현실의 “합리주의적 태도”로 바라본다면, 두가지 가능성이 있게 된다. 박형구가 술에 취해 사고가 난 집에서 잠이 든때 부터는 모두 꿈이라는 가정(즉 교사가 된 박형구의 삶은 모두 꿈이다!), 아니면 아얘 이 영화 전체가 통째로 모두 꿈이라는 가정(즉 형사로서의 박형구, 교사로서의 박형구 모두가 꿈이다!)도 가능하다.
전자의 가정이 약간은 더 개연적이고 세련된 서사이기는 하지만, 교사가 된 박형구가 토끼 인형을 만지는 장면과 뜨개질 강사와 조우하는 장면에서 논리적으로 모순이 생겨 버린다. 형사 박형구는 토끼 인형을 본적도, 뜨개질 강사를 조사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단 영화 전체가 모두 꿈이라는 해석이 논리적으로 무난한 가정이 된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리. 서두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Me and Me”이다. 나와 나, “자아에 대한 고찰”이라는 영화의 주제를 한글 제목보다는 좀더 잘 표현해주고 있다. 나는 이 영화의 한글 제목은 감독이 붙인 것이 아니라고 추측한다. 아마도 제작자나 투자자의 마케팅적 판단이 많이 개입됐을 것이다.
형사 박형구는 사라진 “나”를 찾으려고 고군분투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굳이 찾을 필요가 있을까? 박봉이라고 무시하는 아내, 얼굴보기 힘든 자식들, 자신을 깡패취급하는 세상사람들이 있는, 심지어 6개월 공부하면 쉽게 되는 직업이라고 초등학생도 깔보는 그 형사의 삶을 말이다.
그래도 박형구는 사라진 “나”를 찾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 아니다. “나”는 현재 이 자리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가? 그는 사라진 “나”를 찾는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사라진 아내와 자식들을 찾고, 사라진 자신의 직업을 찾고, 사라진 자신의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건다. “나”라는 존재가 아내와 자식, 직업과 핸드폰 번호와 같은 외부와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내 스스로 존재할수 없는 사태속에서 그가 찾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화는 암전된 화면과 박형구의 “좋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끝을 맺는다. 그는 진짜 “나”를 찾은 것일까? 그가 찾은 진짜 “나”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