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1.평론
하일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9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영화로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을 불러왔던 영화다. 하지만 21세기를 한참 지난 지금은 딱히 그런 미사어구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두 남녀 지식인을 통해 “삶에 있어서의 진실”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주제는 주로 두 인물간의 관계와 캐릭터의 세밀한 묘사를 통해 표현된다.
흔히 영화속의 문성근을 위선적이라 생각하겠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그가 위선적인 인물인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지식인의 위선”을 비판하는 것으로 본다면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문성근은 표면적으로는 전혀 전통적 도덕률에 따른 선함을 표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과 사상은 일종의 쾌락주의라는 목표를 향해 완전히 일치되고 있다. 따라서 위선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는 지식인의 삶이 가지는 공허함, 부실함을 상징하는 것에 가깝다.
영화는 “삶의 진실”을 찾기 위해 주로 인간의 “진심과 말의 관계”에 주목한다. 문성근은 누차 자신의 “진심”을 강수연에게 풀어 놓으려 논리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말로 설명한다. 허나 무엇이 진심인지 그도 잘 모르며, 진심이 말로 풀어질리도 없다. 결국 그는 언어로 사실을 규정 짓는 행위를 할 뿐이며 스스로 그것에 만족하려 하지만 이 얼마나 부질 없는 짓인가!
표면적으로 문성근의 삶은 “거짓됨”이라 할 수 있고 영화는 그것을 그리고는 있지만 단순히 그를 비난하고자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보다 복합적인 시선을 가진다. 문성근은 단순한 악인이라기 보다는 도태된 지식인상에 가깝고 그를 보는 영화의 시선은 무미건조함에 치우쳐 있다.
결혼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데, 여기서의 결혼은 배타적 점유권과 순결이란 허황된 관습으로서의 결혼을 말한다. 문성근이 그의 처에게 하는 발언들과 강수연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약혼자에게 말해야 한다는 행동은 언뜻, 전통적인 사고방식 하에 있는 그가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결혼이란 제도의 허위성을 완전히 인식하고 의식적으로도 분명히 동의하고 있다. 다만 그 같은 행동들을 통해 오히려 전통적 윤리관하에 있는 처와 강수연을 공격하고 조소함으로서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는 것일 뿐이다.
제목과는 달리 이 영화에서 경마장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경마장은 대체 무엇일까? 이는 문성근이 원하는 탐욕의 공간을 상징한다고 볼수 있겠다. 경마장에선 궁극적으로는 결국 모든 돈을 잃게 된다. 문성근은 작품내에서 “경마장”을 여러 차례 직접 언급한다. 이것은 본인 스스로가 자신의 탐욕이 허황된 파멸의 길임을 잘 알고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계속 경마장과 관련된 소설을 끄적이는 것은 그의 부실한 현재의 운명이 문학으로 승화되어 회복될 일말의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영상 측면에서는 전반적으로 “이동화면”이 잘 활용되고 있고 대화 씬을 포함한 대부분의 장면을 컷 대신 연속적인 이동화면으로 연출하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보여줄 것만 보여주는 경제적인 연출도 돋보인다.
아쉬운 점은 영화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성애 묘사인데, 노출을 피하기 위한 카메라 워크가 자연스럽게 가려지는 식이 아니라 마치 아슬아슬하게 신체 주요 부위만 골라 일부러 피해가는 것 같은 식이라 굉장히 우스꽝스럽다. 이 영화에서 성애묘사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인데, 결국 이 때문에 작품의 격이 상당히 떨어지게 되었다. 보다 과감히 연기할 수 있는 배우의 캐스팅이 아쉽다.
2.좋은 영상의 사례
문성근이 오랜만에 가족들과 재회하는 장면이다. 촬영장소는 세트가 아닌 좌식 구조의 매우 비좁은 실제 주거지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들어와 혼잡한 상황이다. 대화의 주제는 안부를 묻는 수준의 것들로서 대화의 밀도가 그리 높지 않다. 즉, 사적이 아닌, 전형적인 공적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카메라는 주로 이동화면을 이용하여 동적이고 대략적인 수준에서 스케치하듯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데, 혼잡하고 공적인 상황을, 컷을 이용한 정적인 포착으로는 사실상 담기가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유려하고 적절하며, 중간중간 적시에 롱샷으로 가족 전체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