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이들을 위한 한줄 소개 :
일본 오타루의 설경을 무대로 펼쳐지는 평범하지 않은 사랑에 관한 추억.
1.평론
일본 오타루의 아름다운 설경이 먼저 감성을 붙잡는다. 북해도 지역의 눈 만큼 시각적으로 관객의 주의를 사로잡을 수 있는 배경이 또 있을까?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소, 편지와 필름 카메라 같은 아이템이 주는 공통점 때문에, 오타루를 배경으로 하는 또 다른 영화, 러브레터를 연상케 하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다르다.
영화는 크게 네 개의 이야기, 윤희(김희애 분)와 준, 고3 졸업생인 딸(김소혜 분)과 엄마인 윤희, 딸과 남자친구, 그리고 윤희와 남편인 인호(유재명 분)의 관계를 그린다. 물론 이야기의 중심은 윤희와 준의 금지된 사랑에 있지만 자칫 놓치기 쉬운 부분은 윤희와 남편 인호의 관계이다. 남편도 불합리한 편견의 희생양이었으며, 이 고통은 후반부 울먹이며 재혼 소식을 알리는 장면에서 아주 잘 표현되고 있다. 사실 이 장면이 영화 전반을 통틀어 가장 감정선을 자극하는 의외의 지점이다.
이 영화는 정적이며, 여백이 많은 영화이다. 서사는 느리게 진행되고, 대사도 짧고 감정은 의도적으로 절제되어 있다. 심지어 윤희와 준의 재회 장면은 극도로 적은 대사에 단순히 암전된 화면으로 짧게 처리되고 있다. 이 같이 절제된 모습들은 모두 윤희의 아픔이 오랜 시간동안 묵혀져 이제는 당연한 삶이 되버린 현실을 표현한다. 그녀의 아픔은 매년 내리는 눈처럼 순수하지만 반복적으로 겪을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것이다. 하지만 기울면 다시 차오르는 만월과 같이 그녀의 인생은 이제 새로히 시작된다.
이 작품은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을 담은, 소위 말하는 “퀴어 영화”로 분류된다. 이처럼 PC(정치적 올바름)주의적 메세지를 담은 영화는 창작자가 사상의 실질은 이해하지 못한채 단순히 형식의 겉껍데기만을 유행에 편승하듯이 이용하게 되어, 결국에는 촌스러운 프로파간다 필름이 되버리는 경우가 많다.(관련 내용 블로그 글 참조 : 링크)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불상사를 피해 비교적 자연스러운 작품이 되었는데, 이는 지극히 사밀한 개인의 사랑 이야기로 내용을 국한 시켰기 때문이다. 특별히 어떤 주장을 하려는 의도를 과하게 내비치지 않고 개인의 인생을 담담히 보여주기만 한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그 특유의 분위기에 있다. 주인공 윤희의 고립된 처지와 외로움이 축축하고 습한 겨울날을 배경으로 이 특유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이는 구체적으로 두가지 요소가 결합된 결과인데, 첫째는 겨울이란 계절과 장소인 오타루의 설경과 한국의 어느 외곽 지역의 쓸쓸한 모습이다. 둘째는 김희애가 연기한 윤희라는 캐릭터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에서 배우 김희애의 연기가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녀의 연기는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연극적인 드라마의 느낌이 난다. 마치 물에 뜬 기름처럼 캐릭터가 영화속에서 혼자 튀는 느낌이다. 그녀는 극중에서 공장 식당의 배식 직원, 딸의 어머니등 여러 역할을 갖고 있는데 배식 직원으로서도, 엄마로서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위화감이 오히려 캐릭터를 극중에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윤희라는 캐릭터의 외로움과 세상과의 단절을 다른의미에서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쉽게 말해 “소 뒷걸음 치다 쥐잡은 격”이라 말할수도 있겠는데, 감독이나 배우가 이런 의외의 효과까지 고려했다고 보이지는 않고, 순전히 우연의 결과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남편의 고통을 묘사한 부분은 좋았지만, 반면에 딸이 가질수 있는 충격을 빠뜨렸다는 것이 이 영화의 아쉬운 지점이다. 딸 입장에서는 자신의 엄마가 동성애자이며, 자신이 억지 결혼에 의해 낳은 자식이라는 사실은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딸이 가질수 있는 엄마에 대한 애증병존의 감정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딸은 단순히 엄마와 준을 매개 시키는 메신저로서의 역할로 소비됨에 그친다. 서사의 구조상 매우 중요한 부분을 놓쳤다고 볼 수 있다.
윤희와 준은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각자의 인생을 살아간다. 여기서 잠깐 왜 두 사람은 뒤늦게라도 결합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실 이제는 두 사람 앞에 아주 큰 장애물은 없기 때문에 영화에서처럼 서로간에 망설일 필요는 크지 않다. 물론 이것은 아련한 미완의 사랑을 만들고자 했던 의도의 결과이지만 이부분을 해명하는 특별한 영화적 장치가 없어 결말이 좀 식상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마지막의 여운이 남는 감성적인 나레이션은 이같은 부족함을 잠시 잊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