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1.평론
이 영화의 연출과 각본을 맡은 이제한 감독은 오랜기간 홍상수 감독의 스텝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형식적인 면에서 홍상수의 영화와 많이 닮아 있다. 홍상수의 영상 문법을 많이 차용하고 있으며, 심지어 출연 배우와 촬영장소까지 동일하다(이런 것들은 원한다면 피할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자신이 존경하는 감독에 대한 오마주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런 유사성들이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점에 있어서는 어느정도 불리할지언정 원칙적으로 영화의 평가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고려사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좋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가져다 써야하지 않겠는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잘 가져다 쓴다면 일단 문제될 것은 없는 것이다.
비록 형식성의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주제적으로는 충분히 감독 고유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를 그리고 있다. 수영 부부가 잃게 될 집이 그 집에 입주할 다른 부부에게는 기쁨이 되고, 시어머니가 죽게 되어 결국 집을 지키게 되는 이야기는 한 사람에게의 슬픔이 다른 누구에게는 기쁨이 될 수 있는 묘한 상황을 그린다. 이는 음양의 구조로 맞물려 돌아가는 이 세상의 아이러니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3의 관찰자의 눈으로 보는 세계. 소피가 바라보는 수영 부부의 모습, 그리고 수영 부부가 바라보는 주호 부부의 모습등은 세계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으로 달리 보일수 있다는 상대주의라기 보다는 정확히는 세계를 관찰하는 우리의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이점에 있어서 소설 소피의 세계와 어느정도 닮은 구석도 있다)
영화는 “우연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과 사람간의 연결과 그들의 관계에 대한 것이며 이러한 관계가 우연히 이루어져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모습들을 포착한다. 아울러 낯선 땅을 여행하는 여행자의 긴장과 설레임을 잘 살려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다만 몇 가지 크고 작은 단점도 눈에 띈다. 일단, 종구 역할을 맡은 배우의 연기에 편차가 있어 몇몇 장면에서는 극의 몰입을 방해 할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영상에 있어서 소소한 문제점도 있는데, 지나치게 롱샷으로 화면을 잡아 균형이 깨지고 불안한 느낌을 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주호 부부의 상황이 작위적으로 주어진다는 것도 문제다. 두 부부가 논쟁하는 치킨집은 공공장소이며 관객은 아주 근접한 수영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보고 있다. 따라서 “공공장소에서의 싸움”이라는 사건을 다루는 자연스러운 영화적 해결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어서 인공적인 느낌을 준다. 싸움 중간에 수영 부부를 잠시 비추어 주위를 환기시킨다거나 건넌편에 아웃포커스로 눈치를 주는 손님등을 배치했더라면 좀더 자연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수영 부부의 애정 어린 장면들도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애정의 근원이 영화 초반부에 충분히 제시되지 못한채로 오랜시간 싸우는 장면만을 먼저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소피의 꿈 장면도 씬이 제공하는 정보량이 적으므로 결과적으로 사족이 되었다. 특히 영화 마지막에서 수영은 독백으로 “이 모든 사건들이 단지 우연인것 같지는 않다”는 취지의 말을 하는데, 이는 영화 전체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중요한 실수가 되었다. 이것은 결국 우연을 필연 혹은 운명이라고 간편하게 단정 지음으로써 영화 내내 보여주었던 “우연성”이 가진 다차원적이고 신비로운 가치를 한번에 훼손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장면은 빼버리거나 좀더 모호하게 남겨두는 것이 좋았을것이다. 그밖에 음악이 주는 정보가 영상과 서사가 주는 정보량을 약간 넘어서고 있는데, 조금만 절제하고 보다 적절한 선곡을 하면 좋았다는 아쉬움도 든다.
전반적으로 감독 고유의 시각을 갖고 이를 충분히 설득력있게 풀어내고는 있으나 형식적으로 홍상수식 문법을 단순히 따라가고 있는 수준에 그친 것은 아쉬운 지점이다. 그러나 아직은 젊은 감독이고 이제 시작이기에 앞으로 자신만의 색을 점차 찾아갈 것으로 기대한다.
2. 좋은 영상의 사례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에 주변의 풀들이 심하게 흔들리는 모습이 보인다. 정황상 이는 아마도 인위적인 바람을 일으켜 찍은 것이 아니라 촬영 당시에 마침 바람이 불어 만들어진 장면으로 보인다. 때맞추어 분 바람 덕분에 우울한 소피의 마음이 외부의 환경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좋은 장면이 만들어 졌다. 이처럼 “우연성”은 영화에 있어서 그 어떤 계획이 만들어 낼수 없는 표현을 가져다주는 마법으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