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1.평론
이 영화에서 박찬욱 감독의 사랑에 대한 탐구는 깊다기 보다는 폭이 넓은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는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된다.
먼저 탕웨이의 사랑에 대하여 살펴보면, 그녀의 사랑은 한마디로 “짝사랑”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이전까지 박해일이 가지는 감정은 예쁜 여자에 대한 애매한 관심 정도의 수준에 머문다. 결코 깊다고 볼수 없는 이 감정은 탕웨이의 자살로 급격한 반전을 이룬다. 그녀의 말처럼 영원한 미결의 사랑으로 그에게 강렬히 남는 것이다. 탕웨이의 감정도 굴곡이 있는데, 초반에 영화는 미스테리한 의심의 껍데기를 씌어 그녀의 본심을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실제로도 불분명하고 미숙한 감정이다. 후반에 이르러 그녀는 박해일을 많이 사랑했음이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영화는 “짝사랑”이라는 일상적인 사랑의 한가지 모델을 “살인”이라는 비일상적인 사건을 빌려, 당사자 간의 감정이 불일치되어 진행되는 “사랑의 경과”를 보여준다.
둘째로, 이 작품은 불륜을 소재로 하는데, 불륜은 사랑의 실체를 탐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도구가 된다. 감정과 관습적인 도덕률이 충돌되는 상황은 창작자가 인습적 관념을 얼마나 정교하게 분석해서 그로부터 자유로워질수 있는지, 그가 가진 이성의 깊이와 유연성을 보여주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불륜이란 소재는 어떻게 활용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륜은 이 영화에서 없어도 큰 상관이 없는 설정에 머문다. 박해일과 탕웨이의 사랑은 정신적인 것에 가깝고, 형사와 용의자란 두사람의 관계가 거리감을 만들어 애초에 불륜이 가져오는 감정과 도덕의 충돌이란 상황이 크게 체감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륜보다는 경찰이 용의자에게 사적인 감정을 가졌다는 “직업적 윤리”가 오히려 두드러져 보이기 까지 하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두가지 사랑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극중 박해일의 부인인 이정현은 성애를 기반으로 하는 육체적 사랑을, 반면 탕웨이는 정서적 만족을 추구하는 정신적 사랑을 상징한다. (참고로 각각을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에로스적 사랑과 필리아적 사랑이라 말할수도 있겠지만 두 단어가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랑을 엄밀하게는 담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 철학이 말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마광수 교수가 쓴 다음 칼럼을 참조 :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29243.html )
영화는 이정현을 지극히 현실적이고 매력없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데, 그렇다면 박찬욱 감독은 정신적 사랑을 지지하는 걸까? 그가 기존 작품들에서 보여준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딱히 그렇게 결론짓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 영화에서 정신적 사랑이 우위에 놓인 것은 우연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감독은 은은하고 애초로운 사랑을 그리려 했을뿐이고 그 결과로 목적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사랑이 정신 본위적으로 그려진 것이다.
이제 영화의 형식적인 측면을 살펴보자. 영화의 초반부의 감정 묘사에 있어서 급격한 진행이 약간 아쉽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박해일과 탕웨이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충분히 정교하게 전개(developing)되고 있다. 특히 두사람이 처음 만난후 취조 중에 이루어지는 은밀한 감정 교류 장면이 돋보인다. 박해일이 고급 초밥을 건내고 식사후 두 사람이 같이 청소를 하고 양치질을 하는 등의 사건이 제시되는데, 이처럼 보여지는 행위들을 통해 보여지지 않는 감정이 교류되는 상황을 훌륭히 표현하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작품답게 이 영화도 고풍스러운 미장센을 보여주고 있고, 이것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적 감각 자체가 영화에 있어서 어떠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인테리어용 장식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각적 아름다움이 영화의 내용과 관계를 지어 어떠한 의미를 창출해야 할 것인데, 본 작품에서는 대체로 미장센이 이러한 기능적 역할까지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올드보이에서 잠시나마 등장했던 실재와 과거에 대한 상념을 통합적으로 묘사하는 시퀀스가 본 작품에서는 완성도 높게 자주 활용되고 있고,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지만, 유사한 영상을 중첩시키는 몽타주 기법이 영상적인 면에서 신선해 보인다.
총평하자면, 사랑의 이야기를 미스테리 스릴러의 형식을 빌려 박찬욱 고유의 완벽주의적인 스타일로 표현해낸 완성도 높은 작품이지만, 과거의 작품들과 비교한다면 특별히 돋보이지는 않는 범작이라 말할수 있겠다.
PS 1 : 탕웨이의 한국어 발음은 물론 전반적으로 배우들의 발음이 잘 들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녹음상의 기술적 문제가 아닐까 싶다.
PS 2 : 아이폰, 애플워치등 디지털 기기의 활용이 영화속에 자연스럽게 잘 녹아 들어 있는 점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PS 3 : 코미디언 김신영의 캐스팅에 대해 논란이 좀 있는거 같은데, 나는 좋은 캐스팅이라 본다.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 주었다.
2.좋은 영상의 사례
#1
본 작품에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 기법으로 내 임의로 “유사 중첩의 몽타주”라 이름 붙여 보았다(이를 지칭하는 기존 학계의 정립된 용어가 이미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독자중 혹시 알고 있는 분은 리플로 알려주시기를). 시각적(기표)으로, 동시에 의미적(기의)으로 유사한 씬을 이어 붙여 몽타주를 구성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영상 세가지를 묶어 보았는데, 이 세 영상도 효과면에서 차이가 있다. 첫번째 암벽 시퀀스와 세번째 손을 가르키는 시퀀스는 결합된 전후 씬들 간에 어떤 의미적인 연관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다만 첫번째 시퀀스의 경우 형이상학적인 각종 해석들이 난무할 자격을 갖추었지만 개인적으로 이 같은 종류의 해석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이들은 단지 유사 씬들이 연속됨으로써 오는 심리적인 리듬감만을 얻을수 있을뿐이며, 이 리듬감은 실제로는 연관관계가 없는 씬임에도 연관성이 있다는 일종의 “착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섹스 시퀀스의 경우, 상기 리듬감은 물론이고 씬들의 결합을 통해 “의미적 연관성”을 표현하는 효과도 거둔다. 구체적으로 이 시퀀스 전체는 “1)두 부부간의 섹스 -> 2)TV에서 보여지는 여자의 고통 -> 3)같은 TV를 보고 있는 탕웨이 -> 4)방구석의 곰팡이를 보는 박해일 -> 5) X레이 사진의 환부 -> 6) X레이 사진의 손 -> 7)박해일의 손” 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1)과 2)는 섹스시의 고통과 여성의 체위라는 유사성으로 단순히 연결된 것이지만, 2)와 3)은 박해일과 탕웨이가 동시에 같은 TV 방송을 보고 있다는 “의미상의 연관성”을 부여하여 두 사람을 의미있는 견련관계에 놓이게 해준다. 3)과 4) 에서 잠시 몽타주의 유사 결합이 끊어지고, 다시 4)와 5)를 통해 이번에는 박해일과 살인사건을 긴밀히 연결시키게 된다. 6)과 7)은 의미의 연관없이 단순히 손이라는 시각적 연결만 있을뿐이며 이 장면을 끝으로 유사 중첩의 몽타주는 해결된다.
#2
조명의 색온도를 통해 시간의 경과가 표현되었다. 초밥을 시킨후의 영상의 색감이 오렌지톤으로 변경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시간이 꽤 흘러 저녁이 되었다는 사실을 간단히 표현할수 있는 것이다.
#3
본 장면도 이 영화에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 기법인데, 상념을 현실 세계와 결합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 박찬욱 감독의 또다른 작품인 올드보이의 학교 계단 시퀀스에서 아주 적절하게 사용된 바 있다.(다만 이 경우는 현재의 상념과 과거의 현실이라는 차이가 있다) 박해일이 탕웨이를 쌍안경을 통해 감시하고 있는데, 박해일의 상념(흡연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행동(자동차 안에서 잠이 드는 행위)이 탕웨이의 현실 세계에서 동시에 묘사되고 있다. 이를 통해 관객은 좀더 박해일의 자아에 근접하여 박해일의 입장에서 영화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4
본 작품은 대사가 독특하고 미려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장면 한가지를 추려 보았다. 살인사건이 반복되는 상황을 박해일은 “공교롭다”고 말하는 반면 탕웨이는 “참 불쌍한 여자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일단 박해일이 구사하는 대사는 전반적으로 문어체에 가까워 고풍스러운 느낌을 준다. “공교롭다”는 단어는 일상에서 흔히 쓰는 단어는 아니라 이런 적당히 수준있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고급스러움을 더해줌과 동시에 문학의 효과인 “낯설게 하기”의 결과도 낳는다. 반면 탕웨이는 극의 설정상 한국어를 잘못하는 외국인이다. 이같은 이유 때문에 그녀의 발언 역시도 문어체에 가깝게 되고 결과적으로 박해일의 대사와 유사한 효과를 거두게 된다.
아울러 본 장면의 끝에서 박해일은 저녁식사로 탕웨이에게 핫도그를 주는데, 이는 과거에 고급초밥을 시켜줬던 것과 대비되어 유머러스하고 소소한 재미를 주는 포인트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