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이들을 위한 한줄 소개 :
니체 철학의 사회과학적 실험을 연극에 담아 스크린에 옮겨 놓다.
[스포주의]
1.평론
도그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니체의 도덕철학에 관한 한편의 우화를, 연극적인 연출을 통해 전달하는 독특한 작품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그빌은 높은 산악지대에 위치한 고립된 가상의 마을로서 거주민이 몇십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다. 소설가를 꿈꾸는 토마스가 지적인 리더로서 마을을 사실상 통솔하고 있다. 어느날 이 마을에 그레이스(니콜 키드먼 분)이라는 정체 불명의 젊은 여성이 등장하게 되고 경찰에 쫒기는 이 여성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살아간다. 초반에는 그럭저럭 친절했던 마을 주민들은 점차 인간 본연의 각종 욕구를 들어내게 되고 그레이스를 학대하고 노예처럼 부려먹는다. 영화의 마지막, 그레이스는 사실 마피아 두목의 딸이었다는것이 밝혀지게 되고, 그녀는 마을 주민들 모두를 죽이고 떠나게 된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크게 “마을주민들 — 토마스 — 그레이스”, 이렇게 삼각 구도로 구분되는데, 이 영화의 주제가 되는 “인간의 위선”에 대한 탐구도 이 구조에 따라 크게 세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첫번째 방식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그빌 주민들의 행동에 대한 묘사다. 도그빌은 집단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회의 전형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사회는 위선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고, 이 위선은 이 마을이 특별히 가지게 된 고유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서 유래한 보편적인 특성으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영화는 마을 주민들이 그레이스에 대하여 행하는 여러가지 이기적인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이같은 위선을 표현하는데, 어린아이들까지 그레이스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장면을 보여주어 인간의 공격성과 이기심이 인간 본성적인 것임을 주장한다. 아울러 마을 주민들은 모두 가난한 약자들이다. 약자가 자신보다 불리한 처지의 그레이스를 착취하고 학대하는 셈이 되는데, 이것은 약자인지 여부가 인간의 선함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번째 방식은 토마스란 인물에 대한 묘사다. 그는 나머지 마을 주민들과 확연히 구분되어지는 캐릭터인데, 나름대로 지적인 도덕주의적인 인물이다. 그는 주민들과 그레이스 사이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모두가 그레이스를 강간할때 그는 선을 넘지않으며 나름의 “윤리”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가 지키는 이 “윤리”라는 것은 일종의 신주단지 같은 것이다. 그는 사실 윤리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으며 “윤리를 지키는 자신의 고귀한 모습”을 사랑한다. 이에 따라 그레이스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려 이 고귀함을 깨뜨리자 그녀의 진짜 정체를 모른채 마피아에게 신고하게 된다.
마지막 방식은 그레이스와 마피아 두목인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토마스의 신고를 받고 도착한 아버지와 일종의 “도덕철학적 대화”를 나눈다. 여기서 대체로 그레이스는 현대의 대중들에게 널리 퍼져 상식화 되어 있는 — 그러나 니체는 반대했던 — “약자의 도덕”을, 아버지는 반대로 니체의 “강자의 도덕”을 대변한다 (여기서 내가 “대체로” 라고 제한 한 것은 두 캐릭터가 이렇게 완전히 획일적으로 니체와 반니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는 특정한 캐릭터가 하나의 입장에 억매이지는 않고 각각의 입장을 섞어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감독은 그레이스와 아버지 어느 쪽도 완전히 지지하지는 않고 두 사람을 모두 비판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다시 말해 감독은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과 사건들을 원칙적으로 “잘못된 사례”의 하나로서 모형적으로 제시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대화에서 그레이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며 인간이 행하는 악행을 환경 탓으로 돌린다(이 부분은 어느정도 니체쪽에 서있다 볼수도 있다). 그녀는 심판 대신 동정을 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개가 본능에 따르듯이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취지로 말한다. 즉, 악자의 악행은 그가 자라난 환경이 원인이므로 우리는 악자를 자비롭게 용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버지는 그녀의 자세가 위선이자 오만이라 주장한다 (여기서 동정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역시 니체와 결을 같이 한다). 용서라는 것 자체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시혜적으로 배푸는 것이기에 그녀의 행동은 자신의 고귀함에 대한 기쁨이라 위선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주장은 고귀함 자체는 좋은 것이고 좋은 것에 기쁨을 느끼는 것이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반박을 한다면 쉽게 무너진다. 이보다는 동정과 용서가 근본적으로 악의 속성인 “슬픔”이란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주장이나, 혹은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악자를 지지하여 그의 악행을 더욱 부추긴다는 기능적인 입장에서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레이스와 반대되는 입장으로서 악자에 대한 처벌을 옹호하며 권력을 적절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힘을 지향했던 니체의 입장에 서있다. 그레이스는 아버지와의 토론후에 일종의 각성을 하게 되고 아버지의 권력을 이어받아 마을 주민들을 모두 사살한다. 심지어 토마스는 직접 권총을 쏘아 죽이게 된다. 이 지점은 니체의 유명한 경구 —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를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주장 중 어느 쪽이 옳은 것일까? 사실 이 주제는 현재에도 첨예하게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문제로서 이 글에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고, 다만 논의를 자유의지에 관한 부분만으로 한정한다면 최근의 인지과학(뇌과학)적 견해들은 대체로 그레이스의 견해쪽에 더 무게를 실어주는 추세인 것 같다. 아무튼 감독은 영화상에서 권력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말고 그것을 적절하게 알맞게 사용해야 한다는 무난하고 상식적인 결론을 내린다. 다시 말하지만 감독은 어느 특정 캐릭터를 이상적인 모델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 문제를 감독은 그저 시현해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이 영화는 대체로 나레이션이나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하여 특정 사상을 직접적으로 전달해 주는 방식을 취한다. 이같은 연출 방식은 원칙적으로 바람직한 방식이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 특유의 연출방식으로 인하여 이같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중화되었는데, 바로 영화 전체를 알레고리로 구성된 우화로 만들어 버리고 모형화시킨 것이다. 이렇게함으로써 표현이 신선하고 친절하다는 느낌을 주며 이것은 직접성으로 오는 관객의 거부감을 상쇄시킨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연극 무대처럼 디자인된 세트에서 배우들이 마치 연극을 공연하듯 연기를 하며, CG를 이용하여 적당히 인공적인 모형의 느낌을 살리고 있다.
이같은 연출 방식을 사소한 것을 생략하고 중요한 것을 부각시키는 “경제적인 연출”이나 “여백의 미”를 살리려는 의도로 파악한다면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라 관객의 감정이입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영화를 이성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극연출에 있어서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이론과 연결된다. 그는 독일의 극작가로서 연출 원칙에 대한 독특한 이론을 주장한다. 지난 수천년간, 그리고 지금까지도 상식으로 통용되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연출방식, 즉 창작물은 관객의 감정을 깊게 이입시켜야 한다는 원칙과 완전하게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창작물은 관객의 감정이입을 차단시키고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자극해야 한다.
이 영화에서의 모형적인 연극무대와 확연하게 “가짜”라는 느낌이 드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관객의 감정이입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며, 관객의 거부감, 분노와 같은 감정을 쉽게 자극 시킬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예를 들면 그레이스가 학대받고 강간당하는) 조차도 영화는 적당히 절제하고 끊어주는 연출을 한다 (참고로 이같은 특징은 감독의 다른 작품인 님포매니악에서의 무미건조한 섹스신, 모형적인 연출등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요컨대, 영화는 연극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모형을 관객에게 제시하는 “사회과학적”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실험은 관객에게 어떤 비판적 사고를 유도 한다.
전체적으로 복잡하고 난해한 주제를 신선한 연출 방식으로 나름 무난하게 풀어가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어딘가 애매하게 부족한 느낌, 미묘하게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인데, 이는 영화가 무난하지 않은 길로 갔기 때문인 듯하다. 새로우면서도 동시에 완벽한 완성도라는 두마리의 토끼를 잡는 것은 좀처럼 힘든일이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PS.1 : 제목의 도그빌이란 이름의 도그(dog)는 마을을 비하하려는 의도에서 즉, “개” 같다고 욕하려는 의도는 당연히 아니다. 트리에 감독은 덴마크 출신으로 알다시피 유럽인들은 개들을 어쩌면 인간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아이들까지도 모두 죽지만 유일하게 키우던 개만이 살아 남는다.
PS.2 : 그레이스가 마을의 희생양이었다는 점이 언뜻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유명한 철학자 르네 지라르의 이론을 연상시키지만, 이 영화에서 그레이스를 집단의 안정을 위한 도구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희생양 이론과의 접점은 없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