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1.평론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기독교의 원죄 의식을 인간 불행의 주요 원인중 하나로 보았다. 이 영화는 이러한 관점에서 성에 빗대어 기독교를 비판하고, 기독교가 만들어낸 죄의식으로 인한 불행에 대하여 탐구하는 작품이다. 표면적으로는 성이 부각되었지만 사실 성은 주로 도구로 사용되는 셈이고, 영화의 보다 깊은 의도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문화권이 아닌 한국의 관객들 입장에서는 “기독교-죄의식-불행”으로 이어지는 주제의 구조를 완전하게 공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사 본인이 기독교 신자라 하더라도 천년 넘게 쌓여온 기독교의 토양 아래 성립된 서양 문화권에서 나고 자란 사람과는 당연히 차이가 있을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쨋든 영화의 목표는 “기독교 – 죄의식에 기반한 불행 – 성”, 이렇게 세 요소로 이루어진 도식의 연결관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했는데. 기독교와 성이란 요소는 잘 표현되었지만 불행의 표현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느낌이다. 주인공의 우울함이 만족스럽게 표현 되지는 못하고 그저 침대에 누워 나 우울해라고 말할뿐이다. 감독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영화 속의 성적 표현에 지나치게 주목한 듯 싶다. 결국 정작 중요한 부분이 부족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영화는 노년의 남성과 주인공인 여성 조의 가톨릭적 고해성사 구도의 대화를 통해 진행된다. 조는 “왜 종교의 감성적 부분이 종교 그 자체보다 오래된 것인가”라고 남성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는 감독이 기독교의 기원을 짚으며 그것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종교는 두려움이란 인간의 “감성적” 부분의 산물이다. 즉, 우리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상상에 불과하다. 이렇게 형성된 막연한 원시 종교의 개념은 시간이 지나면서 신학자들에 의해 정교하게 이론화되고 교리라는 형식을 갖추게 된다. 원시 기독교가 플라톤 철학의 옷을 입고 세계에 전파된 것 처럼 말이다.
조와 그녀의 친구들은 섹스 동아리를 만들고 낭만적 사랑에 반항하는 활동을 한다. 즉, 순수한 성애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낭만적 사랑이란 개념은 섹스를 원칙적으로 죄로 보고 예외적으로 혼인과 출산을 섹스의 면죄 사유로 보았던 기독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같은 종류의 사랑은 인간 본연의 소유욕에 대단히 취약하므로 상대방을 끊임없이 소유하고 구속함으로서 유지될 수 밖에 없다. 계속 해서 그녀는 말한다. 사랑이 만들어낸 죄가 100이라면 섹스가 만들어낸 죄는 1도 안된다고. 여기서 조금 비약하자면 사랑(낭만적)이 만들어낸 죄를 십자군 전쟁 이래로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여러 종교적 전쟁들을 말하는 것이라 볼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또다른 쟁점인 성은 학구적으로 다루어진다. 포르노라기 보다는 의학 교과서에 가까운 느낌이다. 즉, 여기서의 성은 객관적이고 우아하게 표현된다. 따라서 야한 장면을 기대하고 이 영화를 본다면 크게 실망할 듯 싶다. 실제로 많이들 실망을 했는지 영화의 후편인 볼륨2의 흥행은 본 작품의 절반에도 못미치고 있다.
주인공인 조는 색정증 환자인데, 이런 특수하고 과장된 사례에 대한 탐구가 성이란 일반 개념에 대한 것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가 문제될수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말했듯, 모든 인간은 약간의 신경증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색정증이라는 과도한 성적 집착을 탐구함으로써 오히려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진 일반적인 성욕의 진실에 접근해 나갈수 있는 것이다.
조는 자신이 가진 색정증을 “자신의 욕정에 중독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색정증은 욕망에 대한 욕망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외부 세계에 별개로 존재하는 돈을 욕망하는 도박 중독하고 색정증은 욕망의 구조가 다르다는 것이 조의 주장이다. 이것이 말이 되려면 “욕구하는 나의 모습”을 욕구해야 하는 것인데, 색정증이 딱히 그렇다고 볼 만한 근거는 없고 영화 어디에서도 그런 묘사는 없으며, 해명없이 막연하게 넘어가고 있다.
반면 색정증에 대한 또다른 조의 철학은 매우 흥미롭다. 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색정증 환자가 한사람과의 섹스에 만족을 못해서 여러 사람과 섹스를 한다고 오해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각각의 파트너는 부분적인 만족만을 줄 수 있을 뿐이고 그들의 부분들의 만족이 모여 총합인 단 하나의 만족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결국 색정증 환자는 여러 사람을 만나지만 환자 내부적으로는 단 한사람만을 만나는 셈이 된다. 사실 이 주장은 색정증 환자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일반인의 보편적인 심리가 될수 있는 것이다. 성적으로 완벽함을 제공할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따라서 한사람에게만 완벽한 성적 만족을 얻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체나 사물에 성적 욕망이 투영되는 페티시즘을 도입할때 더욱 분명해지는데 이에 대한 것도 영화에서 재치있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후술할 영상 사례 설명에서 계속 하겠다.
본 작품은 모던하고 간결한 미장센이 돋보이는데, 섹스의 묘사에 있어서도 일관되게 미적인 아름다움이 유지된다 (비록 감독의 인터뷰에서는 추함을 보여주려고 했다지만). 심지어 남녀 성기 조차도 외형적으로 아름다움을 보여주어 추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참고로 섹스씬의 상당부분은 대역인 포르노 배우의 촬영분과 합성을 했고, 인공 성기등이 활용되었다고 한다 (이점에서 영화의 리얼리즘과 관련해서 감독 본인이 주창했던 도그마 선언은 완전히 폐기된 것 같아 재미있다).
이제 영화의 형식적인 측면에 대해 살펴보자. 마케팅 측면에서나 영화의 소재 측면에서나 지나치게 성에 집중되어 이 영화가 가진 미덕들이 가려진 점이 많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이 구사하는 표현의 특성을 개념화하자면, “모형화”, “유머러스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시되는 섹스씬들이 하나의 기호이자 모형으로 제시된다. 즉, 사실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단순히 노출 수위만을 보고 이들을 적나라한 묘사라 오해할지도 모르겠는데 이보다 더 적나라한 포르노는 지천에 널려있다. 각각의 사례는 하나의 형식적인 모형처럼 제시될 뿐이지 사실의 구체적인 묘사가 아닌 것이다.
아울러 감독은 인간정신에 대한 — 그것도 터부시되는 것에 대한 — 탐구라는 대단히 무거운 주제를 고급스러운 유머 감각으로 부담을 더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주제를 일상의 사례와 재치있게 엮어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솜씨가 대단히 기발하다. 오르간 연주의 화음을 여러 남자의 특성에 빗댄다거나 하는 사례등은 감독이 가진 지성과 뛰어난 관찰력을 엿볼수 있게 해준다.
이 영화는 장편의 한 작품을 두개의 파트로 나누어 각각 별개로 상영되었다. 결국 영화는 조라는 한 여성의 변화를 그리는 성장 영화가 되어야 하겠는데, 그녀의 우울함과 불행을 감독은 어떻게 해결할지 2편이 기대된다.
2.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종교와 이 영화와의 관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본인이 직접 가톨릭을 믿는다고 말한바 있는데, 위 설명대로라면 이 작품과 그의 종교와는 언뜻 모순이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세가지 가능성이 있다. 1)상기 나의 해석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고 사실 감독은 기독교를 비판할 의사가 전혀 없었거나 2)그가 가톨릭을 믿는다고 말한 것이 거짓말이거나(풍자적 의도로 거짓으로 말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3)그가 하나님은 믿지만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 조직이나 교리를 비판하는 것이거나가 그것이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2와 3 중간 어디쯤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이 든다. 관련하여 내가 참고한 그의 인터뷰 링크를 첨부한다 : https://www.criterion.com/current/posts/3135-lars-von-trier-on-breaking-the-waves
3.좋은 영상의 사례
조가 공공장소인 지하철에서 제롬을 상상하며 자위를 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그녀는 여러 남자 탑승객들의 모습중 제롬과 신체 각 부위가 닮은 부분만을 따와서 결합하여 상상속의 완전한 제롬을 만든다. 이는 성욕의 대상이 한 인간의 전체가 아닌 신체의 일부분일수 있으며, 그 대상은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신체의 부분에 대한 성적 욕망인 페티시즘에 대한 것이며, 아울러 가상의 이미지와 교섭한다는 부분은 라캉의 성관계와 관련한 이론도 연상케 한다.(개인적으로 라캉의 이론은 허구라고 보지만)
영화는 위와 같은 관념적인 내용을 재치있고 쉽게 전달하고 있는데, 마치 뉴스의 자료화면처럼 CG로 구현된 퍼즐 에니메이션을 삽입하여 관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 영화는 이처럼 나레이션과 상응하는 영화와 별개의 필름 영상이나 프리젠테이션 영상을 삽입하는 방식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대게 이런 방식은 인위적이거나 유치하게 느껴지기 마련인데 이 영화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이 같은 테크닉이 “어려운 내용을 쉽게 전달한다”는 분명한 사용목적을 가지고 활용되고 있고, 감독 특유의 고급스러운 유머러스함이 기법의 활용에 수반되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