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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네필적 문체란 무엇인가?
이 글에서는 한국의 시네필들 사이에서 종종 사용되어지는 특유의 감성 어린 문체를 “시네필적 문체”라고 지칭하겠는데, 다소 과장된 듯한 표현이 그 형식상의 주된 특징이며, 외래어를 포함하여 일상적으로 흔히 사용되지 않는 단어들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구성되기도 한다. 대체로 함의된 내용을 논리적으로 친절하게 설명하는 형태가 아니라 가독성이 매우 떨어지며, 자신의 감정을 막연하게 표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어 공허한 느낌을 준다. 상징, 은유 등의 시적기교가 정교하게 사용된 것은 아니므로 문학으로서의 “시”와는 차이가 크며, 어느정도 진지하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을 띄는 점에서 철저하게 지적 스노비즘의 바탕에서 작성되는 일명 “보그체”라 불리는 상업용 문체와도 차이가 있다.
2.왜 시네필적 문체가 사용되는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시네필적 문체의 사용을 단순히 허영심이 가득한 스노비즘적 행위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인 것 같다. 물론 과시적 목적에서 이런 문체를 사용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겠지만, 내가 상당기간 관찰한바로는 전부 그렇다고 보기에는 힘든 것 같고, 또 다른 유력한 원인이 있는 것 같다. 먼저 시네필적 문체가 사용된 사례 하나를 살펴보자.
텔레비전은 더 이상 생방송이 아니다. 경영진과 조합은 텔레비전 생방송을 몰아냈다. 행복과 비참, 그리고 여러 문제들, 모든 것은 미리 녹화되고 따라서 지연된다. 그리고 삶 자체가 이처럼 지연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삶이란 그들의 꿈과는 다른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 1979년 장 뤽 고다르 감독
고다르 감독은 텔레비전 방송이 생방송에서 녹화방송 위주로 변화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여기서 그는 전형적인 시네필적 문체를 사용하고 있는데(사실 그나마 정돈된 편이기는 하다), 위 발언을 좀더 가독성 있게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1)텔레비전이 녹화방송으로 변하고 있다. 2)삶의 모든 것이 녹화되고 지연되어 방송된다. 3)방송의 지연은 실제의 삶 자체의 지연과 같다. 4) 지연된 실제의 삶은 원했던(꿈꾸었던) 즉각적인 삶과 차이가 난다
사실 고다르 감독의 이 말은 지나치게 비논리적이라 정신분열적인 느낌을 줄 정도이다. 3)에서 방송과 실제의 삶을 등가로 놓은 것은 비상식적이며, 4)의 사고과정도 대단히 비약적이라 일반인들이 고다르의 말처럼 삶과 꿈의 차이를 느낄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발언 전체를 조망해보자면 고다르 감독은 “텔레비전의 녹화방송 비율이 증가했다”는 사실을 “인간의 삶과 희망의 괴리”라는 거창한 사실과 연결짓고 있는데 이것은 너무나도 심한 과장이다. 그렇다면 고다르 감독은 그의 말년에 유튜브와 각종 소셜미디어에서 누구나 라이브 방송을 하는 것을 목도하며 “드디어 인간의 삶과 꿈이 하나로 일치되는 천국이 왔다”며 감격했을까? 내 생각에 아마도 그러지는 않았을듯 싶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다르 감독이 사건을 심각하게 “과장된 태도”로 바라본다는 것인데, 나는 여기서 시네필적 문체가 아마도 “과장된 감수성”을 가진 자가 자신의 감수성을 표현하는 와중에 사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떠올리게 되었다. 즉, 시네필적 문체는 과장된 감수성의 산물인 것이다.
3.도취와 차분함의 사이에서
일반론적인 이야기로 돌아가서,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차분함”의 모습을 띄는 것이 좋다. 나는 예술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은 없다고 보는데, 다시 말해 예술가도 “과장된 도취상태”보다는 “차분한 감수성”의 바탕에서 창작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부 예술 영역은 디오니소스적 도취가 더 유용할수도 있겠는데, 이를테면 무용이나 혹은 락과 같은 격렬한 음악 정도가 그러한 것 같다. 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예술에서는 차분하고 담백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결과가 더 좋을 것이다.
종종 영화 비평가들도 자신의 비평문을 시네필적 문체로 채우곤 하는데, 비평가는 기본적으로 분석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에 비추어 매우 해로운 행위라 볼수 있겠다. 비평문은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이만큼이나 감동을 받았어요”라며 자신의 감격해하는 과정을 시현해보이는 글이 아니다. 비평가들은 쉽게 이해할수 있는 정돈되고 차분한 문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 물론 단순히 시네필을 자청하는 영화 관객이 자신의 인터넷 공간에 시네필적 문체로 일기식의 글을 쓰는 것을 굳이 말릴 필요는 없겠다. 이들의 행위는 공적인 권위를 가지지 않으므로 딱히 해로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갑자기 담백함으로 유명한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어떤 식의 문체를 쓸지 궁금해졌다.그래서 그의 어록을 찾아봤는데..
남녀가 저녁 식사를 세 번하고도 관계가 진전이 안 되면, 단념하는 게 좋다. — 오즈 야스지로 감독.
이 얼마나 쉽고 분명하면서 담백한 문체인가? 예상대로 고다르 감독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