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너무 많이 쓰는 말 ‘캐릭터’ 혹은 ‘감정’ 이런 말들 있잖아요. 배우는 기본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고, 롤 그러니깐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에 가까워요. 어떤 목적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이지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아닌데 표현하는 일이 배우의 몫인 것처럼 오해되는 것 같아요.
캐릭터라는 것 역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대사나 행동을 수행하고 있을 때 저절로 완성되거든요. 그 사람의 그 말 속에서 삶의 배경 등 모든 것들이 드러나는 것처럼. 캐릭터는 그런 걸 통해서 완성되는 일인데 마치 미리 준비한 설정 같은 일로 오해되는 것 같습니다.
홍상수 감독 영화를 촬영할 때 많은 배우들이 해방감을 느낀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겁니다. 캐릭터나 감정이 아니라 그냥 오롯이 대사에 집중하고 있을 때 이미 하나의 캐릭터로서 살짝 떠올라 와 있는 느낌들 말이죠.” (22.11.6. 에무시네마 GV에서)[글 출처 : 에무시네마]
배우 권해효가 홍상수 감독의 신작 <탑>의 GV에서 자신의 연기론에 대해 짧게 답한 내용으로 보인다. 일단 이 답변은 권해효씨가 미리 계획해서 정리된 내용을 말한게 아니고 즉흥적으로 대답한 것으로 보이며, “연기론”이라는 답변의 대상 자체가 좀 추상적인 것이라 무슨말인지 정확히 이해하기가 약간 어려운 점이 있다. 이 글에서는 권해효씨의 발언을 내 나름대로 짧게 풀어보기로 하겠다.
그의 말을 보다 분명하게 간단히 정리하면, “연기자는 의식적으로 감정이나, 캐릭터를 표현할 것이 아니라 롤(자신의 역할)에 신경써서 달려가면 된다. 그렇게 되면 감정이 자동으로 따라나오며 결과적으로 캐릭터도 완성이 된다” 이다.
여기서 롤과 캐릭터가 각각 무엇인지 분명하지가 않은데, 아마도 롤은 “영화밖에서 보이는 연기자의 모습”이고 캐릭터는 “영화안에서 보이는 연기자의 모습”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다시 말해 롤은 영화 밖 실제 직업인이자 자연인으로서의 권해효인것이고, 캐릭터는 영화안에서의 가상의 등장인물이 되는 것이다.
권해효씨의 설명을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 자전거를 타고 햄버거 배달을 하는 맥도날드 배달원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배달원이 높은 언덕에 있는 집에 배달을 하는 상황이다. 여기서 “빨리 언덕위에 햄버거를 놓고 내려오자”가 롤이다. 캐릭터는 “맥도날드의 우수 배달원”이고, 감정은 “자전거 패달 밟기, 운전대 조절하기, 발 근육 움직이기” 따위가 된다.
이 배달원은 그저 자신의 롤인 “빨리 언덕위에 햄버거를 놓고 내려오자”만 신경쓰면 충분하다. 그러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되는 것이다. 만약 이 사람이 자전거 패달을 얼마나 세게 밟을지, 운전대를 몇도로 조작할지, 발근육을 어떻게 움직일지등에 신경쓰면 행동은 엄청나게 부자연스럽게 될 것이며 자전거는 언덕위에서 비틀댈 것이다. 또한 “나는 맥도날드의 우수 배달원이 될꺼야” 이런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는 것도 불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개념이라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홍상수 감독은 아마도 배우들의 감정이나 행동에 대한 구체적 디렉션은 삼가하는 듯하다. 따라서 좀더 배우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역할이란 거시적인 목표에 집중하게 되고, 이점을 권해효는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