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윤석열 대통령 취임을 맞이하여 전, 현직 두 대통령에 대한 평과 윤석열 정부의 향후 전망에 대한 단상을 남겨 본다.
민족주의의 문재인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지자들 사이에서 흔히 “원칙주의자”로 통하는 것 같다. 사실 원칙주의란 주의(-ism)는 최소한 학문적 영역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를 “정도의 원칙을 걷는 주의”라고 선해한다고 하여도 문재인은 원칙주의자가 아니고 애당초 원칙주의가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좋은 자질인 것도 아니다. 역동적으로 변하는 정세에 긴밀하게 적응해야 하는 대통령의 자리에 융통성없는 원칙주의는 독이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민족주의자다. 그는 확실히 역사의 큰 흐름 중간에 자신이 놓여져 있다고 의식하는것으로 보인다. 즉,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내 기억으로 최근에 이러한 역사의식을 가진 정치인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이것이 문재인이란 한 자연인의 인생에 있어서는 일견 도움이 되지 않는 착각일 수도 있으나 대통령이란 공인으로서는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다.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여느 이데올로기가 그러하듯이 “배타성”이란 요소를 진하게 담고 있다. 즉, 우리 민족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사상을 담고 있어 자연히 타민족을 배척하는 행동으로 흐를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음과 양이 공존하듯이 민족주의가 약간의 이익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위기 상황에서 민족주의가 집단적 행동을 유도하여 돌파구를 마련할수도 있는것이다.
민족주의자 문재인에게 닥친 위기 상황은 바로 코로나 사태였다. 코로나 사태의 대처에 그가 가진 민족주의라는 사상은 큰 문제에 집중하고 국민적 단합을 유도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으리라. 혹자는 코로나 사태가 문재인 정부가 일을 못하게 만들어 해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퇴임시까지의 이례적인 높은 지지율은 없었을 것이다. 정권 후반기 부동산 문제등으로 하락세로 접어들수 밖에 없는 때에 우연히 터진 코로나 사태를 결과적으로는 무난히 막아냄으로써 높은 지지를 계속 유지할수 있었던 것이다.(여기서 내가 “결과적”이란 말을 쓴 이유는 나는 코로나 방역에 우리 정부의 방역정책 보다는 동아시아적 특유의 집단적 문화의 덕이 보다 크게 작용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방역의 총괄책임자인 문재인이 이 공을 가질 충분한 자격은 된다)
하지만, 민족주의의 이점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다. 그 해로운 사상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를 피해갈수는 없는 것이다. 문재인의 민족주의는 구체적으로 남북문제에 있어서 지나치게 단일민족과 통일의 가치를 과대평가하게 만들어 판단의 객관성을 흐려 놓았으며, 사회적 차원에서는 촌스러운 선진국 타령을 늘어 놓아 사회전반적으로 “국가주의”적인 사상을 강화시켰다.
시장주의의 윤석열
윤석열 대통령은 100년전에 미국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고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수준의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에서의 시장주의자다. 사실 윤석열은 아는게 별로 없는 사람이다. 법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는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도 “규칙”이라는 틈바구니 속에서 지극히 협소한 사고 정도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성향적으로는 자신의 편향(친절하게 말해서 불필요한 고집)을 바꾸지 않는 경직된 자세가 과하게 보인다. 과거 출세의 수단이었던 사법시험을 통한 검사직에 오래 근무했던 경력은 그의 이러한 자세를 더욱 가중시켰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딱히 여론을 의식하지도 않을 것이며 자신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것도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는 대중의 아우성 속에서 더욱 힘을 받아 자신의 행동을 보다 굳건히 할지도 모르겠다. 마치 순교에 임하는 종교인들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러한 경직된 자세가 자기편인 보수층이나 당내의 반발을 가져올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그의 임기내에 특별한 사회의 발전이나 유익한 진보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는 상상력이 부족한지라 무언가 일을 크게 벌리기는 곤란할 것이고, 그가 가진 자유 시장주의의 부산물로서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작은 정부를 추구할 것이기에, “국가주의”가 축소될 가능성 정도를 기대해봄직하다.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가 상당히 흥미롭다.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좋지 않은 의미에서)
마치 여러명의 다중 인격이 글을 쓴 것처럼 논리적 정합성이 없는 연설이었는데,
정말로 생각이 다른 여러명의 담당자가 각자 쓴 글을 제대로된 취합없이 그대로 옮긴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잠깐 어제 취임사를 살펴보면 크게 네가지 요점으로 정리해볼수 있겠다.
1.반지성주의 비판
2.자유 (사실 고전적인 자유 시장주의) 의 강조
3.양극화가 자유를 해친다. 통합의 강조
4.통합을 위해 과학, 경제등이 발전 되어야
여기서 1번은 내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주제이기도 하고 제법 적절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2번부터 말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2번에서의 자유는 말이 자유이지 사실은 “경쟁”인 것이다. 결국 고전적 공리주의적 발상에 근거한 경쟁을 통한 승자독식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타고난 재력이나 능력의 소유자가 되지 못하는 대다수의 국민에게는 불리한 이야기요, 사실 일부 타고난 자들에게도 궁극적으로는 불행한 이야기임에는 마찬가지이다.
3번 부터 코미디가 시작된다. 연설은 묘하게도 “양극화”를 “의견의 불일치”와 동일어처럼 은근슬쩍 왜곡하여 다룬다. 물론 의견의 불일치 다시 말해 의견의 다양함은 자유를 강화하고 자유를 강화하는 것은 다시 의견의 다양함을 보장한다. 즉, 양자는 필요충분조건에 있는 것이지 연설에서 처럼 양극화가 자유를 해치는 관계인 것은 아니다. 심지어 연설은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통합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뛰어나게 하면 된다”처럼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무의미한 소리다.
3번을 제대로 바꾼다면, 양극화(실질적으로는 의견의 불일치)로 인한 문제의 해결은 관용(프랑스식) 혹은 나를 의심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열린 자세를 갖는 “합리적 회의주의”를 통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코미디는 4번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대체 통합과 발전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발전을 하게 되면 통합은 멀어지게 되기 쉽상이다. 발전이 가속화 될수록 기득권과 비기득권층의 간극이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대통령이 자신의 5년간의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 취임사인데, 취임사 치고는 너무 조악스러운 글이다. 더욱 놀라운것은 이런 기초적인 논리상의 부실함을 지적하는 언론이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