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드 러셀은 철학, 수학, 과학, 사회학, 교육학, 정치학 등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 활동을 하였는데, 예술에 대해서 만큼은 상대적으로 박한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가 예술 분야를 가벼이 여겼던 것은 아니고 여러 저서에서 분명히 그것의 중요함을 강조했다는 점에 비추어보아, 아마도 그는 자신이 딱히 끼어들어서 성과를 낼 분야는 아니었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아울러 그가 수학의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 예술이 가진 미를 충분히 발견하고 감동하였다고 볼수도 있겠다.
기본적으로 그가 영화에 대해 가졌던 시각은 20세기 초 대부분의 사람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데, 지금과 같이 영화를 독립적인 예술의 한 영역으로 보지는 않았던 것 같고 단지 잡지나 라디오와 같은 대중들의 유희거리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1].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그의 저서 <서양의 지혜>에 프랑스의 영화 감독 르네 클레르의 <막간>이라는 작품이 인용되어 있다. 내가 알기로는 이것이 그가 구체적으로 언급했던 유일한 영화 작품이다.
여기서 이 작품은 책의 내용과 관련된 일종의 보조자료로서 짧게 인용되는데, 영화의 장례식 씬의 사진 한장과 그 아래에 적힌 “클레르의 영화 막간의 장례 행렬 장면. 옛 가치는 조소거리가 되고 생활의 안정성은 사라졌다”라는 하나의 문장이 전부이다. 그렇지만,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은 상당히 난해한 영화를 세기의 지성은 어떻게 해석했을지 슬쩍 살펴볼수 있다는 점에서 러셀의 위 인용에 살을 붙여 좀더 유추해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이다.
러셀에 따르면 19세기는 “낙관주의”의 시대였는데, 이 당시 유럽인들은 기술 문명과 과학의 발달로 “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은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세계는 인간이 가진 이성의 힘으로 날로 진보를 거듭하여 결국에는 완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팽배했다. 이 같은 믿음은 시민들 개개인에게는 “생활의 안정성”을 더해주었는데, 이 믿음은 본 영화가 개봉되기 몇년전에 발발한 세계 1차대전으로 인하여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 이제 더이상 사람들은 인간이 가진 이성의 힘을 믿지 않고 세계를 불안한 곳으로 인식 하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는데, 장례 운구를 황당하게도 “낙타”가 한다.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몸짓으로 뛰어간다. 한마디로 본 씬은 “코미디적인 과장된 연출”이다. 러셀은 이러한 코미디가 장례식으로 상징되는 전통적 가치를 조소하고 있다고 본 것 같다. 그리고 영화 전체가 안정성이 깨진 불안한 유럽사회를 암시 한다고 이해한 것 같다. 비록 러셀의 인용이 너무 짧아 그가 본 작품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상세히 알수는 없지만, 저서에 직접 인용할 정도라면 이 영화 작품을 높게 평가한 것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각주
[1] 나의 조사에 따르면 메이저(?) 철학자들 중에 지금까지 영화를 진지한 예술영역으로 보고 사랑했던 철학자는 장 폴 사르트르가 유일한 것 같다. 그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들을 매우 좋아했다고 하며, 영화 <이반의 어린시절>을 보고 쓴 감상문도 남아있다. (참고로 여기서 메이저 철학자라 함은 몇세기 후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할것이 확실한 철학자를 내 임의로 추정한 것이다.)